등록 : 2005.04.29 17:02
수정 : 2005.04.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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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에 달빛이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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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 아내 잃은 애통한 심사란 고작…
조선시대 능참봉이라도 지냈다면 문집쯤은 남겼다.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낸 징표로서다. 거기에 죽은 아내를 위한 조문 하나쯤 끼어있게 마련이다. 물론 아내가 먼저 죽은 경우에 한해서지만.
제문의 뼈대는 서두(당신을 잃어 슬프다), 회고(훌륭한 며느리, 마누라, 어미였다), 한탄(나는 이제 어떻게 하나), 마무리(나도 당신을 따르리)로 구성된다. 여기에 개별·특수 변주가 덧대어 있을 뿐이다.
<빈방에 달빛이 들면>. ‘조선선비, 아내 잃고 애통한 심사를 적다’라는 처량한 부제의 이 책은 그러한 49개 제문을 한글로 옮겨 묶었다. 공교롭게도 옮긴이 세 명 모두 여성이다.
“달빛이 창에 비칠 때면 교교한 달빛과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당신이 옆에 있나 싶지만 허공에 떠 있는 구름과 거울 속에 비친 꽃처럼 바라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으니 어찌하겠소.”(고용후) 자자구구 애통지사다.
제문에서 어스름 달빛과 그림자를 걷어내면 반가 아녀자와 남정네의 숨은 그림이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기대치는 거의 기계 수준이다. 살림, 시부모 봉양, 자식양육, 봉제사 등 안살림은 기본. 여기에 벼슬아치의 내조자면 더할 나위없다. 자신은 굶고 헐벗어도 남편과 그 손님한테 술이 떨어지지 않게 해야 양처다. 돈이 없으면 치맛감이나 머리카락을 팔아야 했다. 한량 남편 산수유람 비용도 군소리 없이 대야 했다. 남자의 관운에 따라 숙인, 정부인, 정경부인이 되는 사회였던 까닭이다. 왜곡이 없지 않을지나 여성은 ‘남편바라기’였다. 행여 남편이 옥살이를 한다면 제액을 위해 대신 죽음도 불사해야 했고 남편이 발병하여 위독하면 살을 저미고 피를 내어 살려내야 했다. 죽어서도 팔자는 달라지지 않는다. 조상의 무덤 발치에 묻혀 이승에서처럼 시부모를 봉양해야 했다.
남편 양반들은 어떠한가. 오로지 출세하여 가문을 빛내는 것이 지상목표인 ‘서울바라기’였던 것. 따라서 벼슬에 오르기 위해 “10여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성균관에 응시하느라 어떤 해는 한 해에 두 번 가기도 했고, 가서는 5~6개월 머물며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는 것. 환로에서는 성은을 싸고 모사와 정쟁을 일삼고 거기서 패퇴하면 정배되어 아내가 죽어도 멀리서 제문을 지어보내 대신 읽게 한다. 막상 현실에 닥치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전장에 처하여 자신은 달아나고 남겨진 아내는 자결하게 만드는 일까지 생긴다.
또 혼자 남은 남편들이 왜 그리 징징대는가. 맹자를 들먹이면서 ‘늙은 홀아비가 호소할 데 없는 궁한 백성’이라 하는가 하면 “의지할 곳을 모르겠으니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중이나 될까”라며 엄살이다. “이제 내 해어진 옷은 누가 기워주며 내 끼니는 누가 챙겨준단 말이오.” 죽은 아내보다 자신이 더 애처롭다. “그나마 당신이 죽어서는 내가 상주가 된다지만 나 죽은 뒤에는 누가 상주가 된단 말이오.” 걱정도 팔자다.
젯상 한번 차린 것을 두고도 생색이다. “당신이 예전에 내게 음식을 차려주었듯, 이번엔 내가 음식을 마련해 당신을 대접하오. 당신이 나를 공양하던 마음으로 내가 오늘 당신을 대접하는 심정”이라고. 실제로 스스로 음식을 마련했는지도 모르지만 참 뻔뻔스럽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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