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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9 17:38 수정 : 2005.04.29 17:38

평론가들이 자주 쓰는 말에 작가의식이란 것이 있소. 작가의 그다움을 지칭하는 말로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달리 있기 어렵소.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정신활동의 언어적 표현이 문학이라는 대전제를 그 말이 민첩히 수용하고 있기에 그러하오. 이 나라 근대문학은 당초부터 이 대전제에서 출발했고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4·19, 그리고 80년대까지 흔들림 없이 전개되었소. 그만큼 정치적이었고 또한 윤리적이었다고 할까. 이를 촌시도 잊지 않은 글쓰기를 일러 작가의식이라 했소. 작가적 자부심의 근거도 이에서 말미암았소.

이 작가의식이 제일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 물음은 곧 작품의 현장성을 묻는 것. 두루 아는 바, 어느 사회나 국가에도 위로는 정치적, 아래로는 도덕적 터부가 바위 모양 버티고 있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춰라’를 헤겔 모양 ‘여기가 장미다, 여기서 춤춰라’라고 돌려 표현함이란, 저들의 터부에 주저앉는 꼴일 뿐. 황혼이 되고서야 가까스로 나는 부엉이 꼴이 아니고 새삼 무엇이겠소. 대낮에라도, 동트는 아침에도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쉼 없이 눈뜨고 나는 부엉이, 그것의 별칭이 작가의식이오. 요컨대 전천후적 깨어 있는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그렇지 않았다가는 어느새 터부들이 사방팔방에서 옥죄어들어 숨통을 막기에 모자람이 없소.

그렇다면 이 터부의 움직임 여부를 잴 수 있는 눈금이란 무엇인가. 작품이 그 정답. 그 눈금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장소는 대체 어디일까. 작가의식을 문제삼는 한 이 물음에는 작품 그것에 우선하는 그 무엇이 잠겨 있소. 요컨대 작가의식이 드러나 훤히 보이는 장소, 이를 일러 현장성이라 하오. 독자(평론가)의 몫이 놓인 곳, 그 이름이 소위 작품을 참으로 작품이게끔 하는 현장성이오. 독자 쪽이 발견해야 하는 것이기에 현장성은 지극히 원초적 감각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소. 논리도 철학도 어떤 관념도 아닌 원초적 방식이란 새삼 무엇인가.

60년대 이래 이 나라 작품 읽기에 종사해온 내가 발견한 감동적인 현장감 몇 가지를 잠시 소개하고 싶소.

(A) “보도에 내려서는 조금 걸어가다가 준구는 또 그 ‘착각’을 일으켰다. 그것은 착각이라기보다 ‘허깨비’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갠 하늘에 여자의 다리 하나가 오늘도 걸려 있다. 허벅다리 아래가 뚝 잘린 다리다.”(최인훈, <하늘의 다리>, 1970)

쇼윈도에 양말을 신겨 거꾸로 세워놓은 마네킹 다리 모양의 여자의 허벅다리가 애드벌룬 모양 하늘에 떠 있다니. 대체 이 허깨비란 무엇인가. 어째서 이 착각이 준구라는 주인공에게만 나타날까. 갈데없는 환각이지요. 1·4후퇴로 월남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이 허깨비란 새삼 무엇일까. 고향 북한땅을 그리워하는 원초적 인간 본능을 억압하는 70년대의 제일 강한 금기사항에 도전하는 작가의식이 거기 생생히 숨쉬고 있었던 것.

(B) “더운 여름날 당신은 그 고구마밭에 아기구덕을 지고 가 김을 매었다. 옴팡진 밭이라 바람이 넘나들지 않았다. 바람 한점 없는 대낮 (…)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환청은 자주 일어났다.”(현기영, <순이삼촌>, 1978)

4·3사건에 남편 잃은 순이삼촌에겐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귀에서 총소리가 쟁쟁하다는 것. 그녀만이 듣는 이 환청이란 새삼 무엇인가. 4·3사건이라는 금기사항을 돌파하는 문학적 기법이 이것 외에 달리 있을 수 있었을까.


(C) “모두가 그 독가스 탓이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거리에서도 잠자리에서도 그 지독한 놈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요. (…) 한번은 큰 병원에 찾아가 하소연을 했더니 기관지엔 이상이 없다며 차라리 정신신경과를 찾아서 상담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어요. 기가 막혀서.”(임철우, <직선과 독가스>, 1984)

5월의 광주에서 살아남은 청년의 독백이오. 있지도 않은 냄새 맡기인 것.

터부와의 싸움에서 작가들은 어째서 환각, 환청, 환후(幻嗅)로써 돌파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터부라는 괴물의 성격에서 말미암았던 것.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을 먹고 사는 이 괴물에 맞서는 길은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한 방법이어야 하기 때문. 곧 온몸으로 부딪치는 길이 그것. 온몸이란 새삼 무엇인가.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감각기관이 그것. 있지도 않은 허깨비를 선명히 보아버리기, 있지도 않은 소리를 뚜렷이 듣기, 있지도 않은 냄새를 지독하게 맡아버리기,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또 이길 수 있는 방도가 여기에 있었소. 우리를 그토록 억압했던 분단 문제, 4·3사건, 5월의 광주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있지도 않은 허깨비들, 일종의 환각이고, 환청이고, 환후였던 것. 이 현장성의 휘황함이여. ‘우리 문학 만세!’라고 내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리는 까닭이오.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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