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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원로 시인 김규동(80)씨가 14년 만의 신작 시집 <느릅나무에게>(창비)를 내놓았다. “닭이나 먹는 옥수수를/어머니/남쪽 우리들이 보냅니다/아들의 불효를 용서하셨듯이/어머니/형제의 우둔함을 용서하세요”(<어머니는 다 용서하신다> 전문)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된 이 짧은 시는 월남한 시인 자신의 처지에 분단 현실의 비극성을 포개 놓은 수작이다. 지금껏 살아 있기 어려울 북녘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사료 수준의 조악한 식량을 동포에게 보내는 현실의 일그러진 단면이 어우러져 이 시는 시집을 펴서 읽는 독자에게 벽력같은 충격을 준다. 노 시인에게 필생의 한으로 자리 잡은 분단의 아픔이 주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회한의 정서를 수반하는 것은 이 시집의 특징적인 양상이다. “북녘/내 어머니시여/놀다 놀다/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죽여주옵소서>) “너를 보게 될까 하여/오래도록 기다렸다/(…)/얘야, 38선 없애버리고 빨리 오너라.”(<저승에서 온 어머님 편지>) 어머니의 재촉은 아들의 죄책감과 짝을 이룬다. 뒤의 시에서 ‘어머니’가 하나 된 민족이라는 당위를 대표한다면, 앞의 시에서 불충한 ‘아들’은 갈라진 민족 현실을 대리한다. 뺀질뺀질 게으른 현실이 추상같은 당위 앞에 종아리를 걷고 매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반쯤 죽여주소서”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격렬함은 “규천아, 나다 형이다”(<천(天)> 전문)라는 한 줄짜리 절규로 이어진다. “죽기 전에 못 가면/죽어서 날아가마/나무야”(<느릅나무에게>)의 나무는 필시 어머니와 동생을 대신하는 사물일 터이다. 노시인의 필생의 한 통일을 향한 비원 호소력있게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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