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06 17:42
수정 : 2005.05.0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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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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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난 모범생 조르주의 학교 성적이 갑자기 떨어졌다. 어릴 때 부모의 직장 바꾸기 등으로 이사를 자주해 할머니와 유모 손에 자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얼마전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침이면 집을 나서 저녁에 귀가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숨겨진 사실은 또 있었다. 아버지는 장모 등 처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은 이런 사실들을 간파했고 불쌍한 아버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려고 ‘해고, 아들공부 따위 신경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쪽으로 마음이 돌아가 공부를 포기했던 것이다.
이런 류의 ‘가족 비밀’은 부모의 외도나 범죄행위, 실직, 이복형제의 존재, 소외, 특이한 외모 등 감추거나 외면하고 싶은 주변 일상사들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잘못된 대응을 통해 형성된다. 문제는 흔히 그런 크고 작은 비밀이 있음에도 그것을 생각해서도 안되고 말해서도 안되는 분위기다. 아이가 사실의 전부나 일부를 알고 있는데도 쉬쉬할 때 그는 정신적으로 이중성을 띠게 되고 심하면 자살에까지 이르는 성장장애, 대화장애, 정신장애를 겪게 된다. 그게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 상처는 몇세대에 걸쳐 흔적을 남긴다.
<가족의 비밀>의 저자 세르주 티스롱은 “가족내에 비밀이 있을 경우 비밀을 쥐고 있는 당사자가 이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침묵을 고수하는 경우보다 언제나 낫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가족 내부에 위기가 고조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부모를 이상화하거나 자식에게 완벽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비밀을 낳는다. 한꺼번에 털어놓기 어려우면 비밀의 존재사실만이라도 알려주라고 저자는 권고한다. 비밀을 털어놓는다 해서 상흔들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체성 재정립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의사인 저자는 국가 차원의 비밀도 가족 차원의 비밀과 같은 매커니즘을 따를 뿐만 아니라 서로 상승효과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고 경고한다. “국가적 사안을 놓고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나라의 가정에서는 자녀들 또한 바로 이러한 이중성으로 고통받는다. 자녀들도 부모에 뒤이어 똑같은 비밀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자녀들은 가족적 의리에 충실함으로써 부모가 감수해야 했던 이중성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답습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규모가 작은 사회단위인 당파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비밀은 당파의 결속을 다지고 확대 재생산을 이끌어내는 기본 매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식민지, 친일, 반공, 전쟁 등 어두운 과거사나 약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이중적 태도를 떠올려 보면,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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