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06 17:45
수정 : 2005.05.06 17:45
우리네 농사 연장
진짜 ‘시장질’이 뭔지 꼭 한번 보여주마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만들자. 이런 꿈을 가지고 산 지가 벌써 십년 째인데, 몸은 아직도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이다 보니, 시골구석이라고 책을 만들지 못하란 법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서울살이에서 이리저리 새어나가는 시간을 잘 모아 쓰면 좀더 알찬 책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소나무출판사에서 펴내는 ‘자연을 닮은 책’은 시골살이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여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해서 펴내는 연속 기획이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일곱 권의 책이 나왔으니, 일년에 한 권 꼴인 셈이다. 그야말로 소걸음 걷듯이 천천히 한 권 한 권 나오고 있다. 시간도 많이 들고 공도 많이 들지만, 판매는 별로인 이 책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농사꾼이 일등 신랑감이 되는 그런 날이 꼭 온다는 똥고집 같은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4월에 나온 <우리네 농사 연장>은 민속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농사꾼이 전통 농사 도구에 대해 쓴 책이다. 우선 이런 필자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연장을 잘 다루는 농사꾼은 글을 쓰기 어렵고, 연장에 얽힌 민속학적인 정보량이 많은 학자들의 글은 딱딱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역시 좋은 글이란 직접 체험한 바탕 위에 공부가 더해졌을 때 나온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은이 김재호는 농사 연장의 모양과 쓰임새는 물론, 민담과 속담 등 그 연장에 얽힌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 배우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로 책을 꽉 채웠다.
거기에 세밀화로 단련된 화가 이제호가 불러일으키는 한국적 감수성도 빼어나다. 기획자 안철환도 농사꾼일 뿐 아니라, 프랑스에 있는 ‘기산 풍속도’를 섭외해 수록해서 책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 더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지게, 호미, 쟁기, 키, 똥장군 등 한국인의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물건들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구를 쓰는 원숭이가 아니던가? 우리 선조가 수천 년을 써오면서 우리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해온 우리네 농사 연장! 정말 멋진 출판 소재가 아닌가? 전국민의 필독서가 된다 한들 믿어 의심치 않을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박수갈채는커녕 발간 1년이 넘도록 아직 초판을 못 넘기고 있다. 원고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든 이들로서는 정말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듯이, 책이 나가지 않는 이유는 백 가지도 넘을 수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를 대도 사후약방문일 뿐이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언젠가 찾아올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다.
요즘 출판계는 마케팅 전성시대다. 더구나 이른바 글로벌 마케팅 시대다. 해리 포터와 다빈치 코드의 시대에 케케묵은 농사 연장을 들고 나와 종이값 파동을 일으키겠다는 것이 무모할 뿐더러 비마케팅적 발상이라고? ‘마케팅’을 우리말로 하면 ‘시장질’이 될 텐데, 진짜 시장질이 무언지 한번은 꼭 보여주겠다는 것이 소나무의 야무진 꿈이다. 그것도 아주 한국적인 책으로 시장을 풍비박산 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온 국민이 농사꾼이자 철학자인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는 거다. 얼마나 멋진 꿈인가?
유재현(소나무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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