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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군사독재 문화 가식지 않았다”
은퇴후 경기교인혐의회 의장으로 활동 9일 은퇴식을 앞두고 만난 원로 목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사회적 실천’은 둘이 아닌 듯 보였다. 그가 봉직했던 수원교회는 교회 벽을 돌로 지었다 해서 ‘돌교회’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유신시절과 80년대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돌교회’는 성공회 교동성당과 함께 경기 지역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각종 집회와 금지된 강연이 열리는 ‘민주운동’의 대명사로 회자됐다. 이들이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감시 속에서도 6·10항쟁 등 각종 지역 시국집회들을 ‘돌교회’ 등에서 감행할 수 있던 것은 그곳에 윤 목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신헌법이 제정된 70년대, 당시 수원 기독교연합회장으로 있으면서 경기도에서 열린 유신헌법 설명회에 참석했죠. 질의응답시간에 일어나서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막는 유신헌법은 ‘민주주의 적’이라고 했더니 분위가 참 냉냉했죠”라며 그는 웃었다. 70∼80년대 내내 요시찰 인물로 찍혔을 당시에는 수의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는 “늘 이제는 감옥에 가야 할 때라는 생각이 엄습했죠. 아내에게 두꺼운 옷을 만들어 놓으라고 해놓고는 강단에서는 설교를 통해 유신시대와 군부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니까 경찰이 정작 나를 빼고 장로들을 괴롭혔다”며 주위 사람에게 준 불편에 미안해했다. 그러나 역사가 그를 부를 때는 어김없이 행동으로 옮긴 목사였다. 군부독재 종식을 요구하는 국민항쟁이 들불처럼 번지던 1987년 6월10일, 그는 ‘민주헌법쟁위 국민운동본부’ 경기지역 대표로 시민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당시 1천여 명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거리로 수원 시내 곳곳을 누비며 벌인 이 시위는 4·19 이후 수원에서 벌어진 최초의 정치적 집회로 평가받고 있다. 윤 목사는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리라’는 말이 있죠. 뜻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자유와 정의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사회, 제도 속에 실현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선교적 과제를 끌어안은 그의 은퇴가 청년처럼 젊어 보이는 까닭이다. 수원/글·사진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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