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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 '흉터와 무늬' 낸 최영미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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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는 오랜 꿈이었다. 시로 등단하기 전부터 소설을 습작해 왔다. 1989년 무렵 원고 300장 분량의 소설을 써서 이문열 선생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연애소설이다. 당시 이문열 선생은 "아직 소설이 아니다. 세 번 정도 고치면 소설이 되겠다"면서도 "문장이 정확하다. 앞으로 소설가가 되겠다"고 말했다.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창비에서 낸 뒤 2년만에 이문열 선생을 다시 찾아갔는데 "시편 하나하나에 스토리가 있다. 한 편의 시가 한 편의 단편소설 같다.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당시 첫 시집이 너무 '잘 나간' 덕분인지 소설을 써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 산문집을 몇 권 냈는데 그것을 읽고난 서영은 선생도 소설을써보라고 권했다. 이십대부터 소설가가 되겠다는 욕망은 있었으나 실제로 소설가가 될 것이라고는상상하지 않았다. 마흔 살이 가까워서야 옛날 꿈이 절실해졌던 것 같다. 인생을 돌아볼 시기가 된 것이다. --이번 소설은 언제부터 썼나.
△1990년대 후반부터 구상했다가 2001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썼다. 소설속에 많은 취재자료가 들어 있다. --소설에 자전적 요소가 들어 있나.
△작품속 유년시절의 배경을 제외하면 등장인물들이나 스토리는 모두 허구다. 여러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독자들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그럴듯한 소설을 썼다고 칭찬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다만 소설이 아무리 허구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목소리가 녹아든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모르는 것을 쓸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작가의 개인사를 쓰더라도 소설로 쓰면 허구가 된다고 본다.
글쓰기에는 언제나 상상과 주관이 개입한다. 4-5년간 소설의 주인공 정하경에 매달리다 보니 내 성격도 소설속 인물을 닮아 갔다. --시에서 소설로 전향하는 과정은 어땠나.
△너무 고생했다. 지난 4년간은 시인이라는 과거와 소설가가 되려는 현재 사이의 투쟁과정이었다. 스스로 다른 사람이 돼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장편 분량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앞섰고, 소설은 장면을 세밀하고도 친절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여 지냈다. 이 때문에 문장의 밀도를 조절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초고를 써놓고 문장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열 차례나 고쳐 썼다.
그러나 열 번째 원고를 보니까 결국 초고와 닮아 있었다. 처음 내 안에서 나온대로 묘사했던 것이 가장 생생했다. 그래서 내 스타일대로 쓰자고 마음 먹었다. 비약이 많은 시에 비해 소설은 문장을 세세하게 늘여야 했는데 그것이 구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다른 시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시는 소설에 비해 정신적인 노동이라고 본다. 소설은 정신적인 노동과 육체적인 노동이 함께 한다. 시집을 출간할 때는 한나절에도 교정을 볼 수 있지만 장편소설은 1-2개월은 교정을 봐야 한다. 글을 많이 고치는 편인데 4년간 소설에 매달리면서 목과 어깨사이 인대가 늘어나 병원에서 주사를 맞기도 했다. 힘들게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들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첫 소설로 가족소설을 선택한 이유는.
△처음엔 8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연애소설을 쓰려 했다. 그 소설을 썼던 시기가 80년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인지 객관적 거리확보가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가장쓰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다시 생각하게 됐다. 흑백논리가 지배했던 파란많은 한국역사에서 이름없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글로 써보기로 했다. 가까운 사람들이 겪은 훈장없는 상처를 소설에 담고자 한 것이다.
유교문화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동안 어느 가정이 겪은 평범치 않은 삶과 비틀린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우리 사회에 그런 가정은 너무 많다. 한집 건너 뚜껑을 열어보면 모두 소설감이다. 가족은 삶에서 가장 큰 화두이자 떨칠 수 없는 숙명이다. 연애 이야기는 끝이있지만 가족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래서 가족소설을 썼다. --습작소설을 썼을 때 1980년대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그 습작소설을 쓸때는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냉정함이 없었다. 그래서 시로 먼저 등단한 것이다. 이후 몇 권의 산문집을 낸 것이 소설을 쓰는 데 좋은 훈련이 됐다. 이제는 1980년대가 어느 정도 정리됐다. 흑백논리가 팽배한 시기를 살아온 소설의 주인공 정일도는 '신념에 찬 우익'을 표상한다. 그를 통해 우익으로 살기도 힘들다는 것을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을 판단할 때 좌우 흑백논리로 판단하는것은 큰 문제다. 자라는 세대들에게 그것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로서 의무감도 들었다.
지금의 풍요는 공짜가 아니다. 이를 위해 전 세대가 혹독한 대가를치렀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T.S. 엘리어트의 "역사에는 많은 숨겨진 통로가 있다"는 시구절을 수없이 되뇌었다. 역사의 숨겨진 밑창을 드러내고, 숨겨진 통로를 발견하고자 이번 소설을 썼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어떻게 보냈나.
△아무것도 모른 시기에 시인으로 등단해 실수를 많이 했다.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한 '잔치'를 1980년대 '운동'의 상징으로 읽으면서 많은 오해가 생겼다. 누군가 "석사학위를 가진 매춘부의 언어"라고 인신공격적인 평을 하기도 했는데, 마음고생이 심했다.
첫 시집이 너무 성공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몇년간 허송세월을 보낸 셈이다. 문단의 생리를 잘 몰라 처신하기 어려웠다.
마흔 살이 가까워 오면서 혹독한 자기반성을 했다. 지난날의 어려움은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과도 화해했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부딪히지 말자, 글을 쓰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소설의 서두에 "신이여, 이 글을 썼던 손을 용서하소서"라고 쓴 의미는 무엇인가.
△취재했던 사람들과 후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소화해 썼는지 두려워 적은 글이다. 소설에 묘사된 사람들에게 상처를 드렸다면 용서해달라는 의미다. --앞으로 계획은.
△당분간 소설을 쓰겠다. 장편소설 세 편을 쓸때까지 다른 일은 자제하려 한다. 그러나 시가 튀어나오면 어쩔 수 없다. 시는 마음의 고향이다. 다만 소설가로서 나는 신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 모든 작가들의 태도와 글에서 배울 것이 많다. 앞으로 연애소설 3부작을 쓰려 한다. 3분의 1정도는 이미 써놓았다. 1980년대,1990년대, 2000년대를 각기 배경으로 삼은 세 가지 빛깔의 소설이 될 것이다. 첫 편은 장편이고 나머지 두 편은 중편으로 완성해 연작형태로 출간할 예정이다. 축구를 좋아해 소설책이 예정대로 4월에 출간됐더라면 유럽에 갈 계획이었는데 늦어져 포기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대회 때 축구협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앞으로 축구관련 책도 써볼까 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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