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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3 17:35 수정 : 2005.05.13 17:35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새옷’ 갈아입고도 창고에 쌓이기만

누군가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 가운데 몇 가지를 추천하라면 주저없이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부터 꼽는다. <사람아 아, 사람아> 같은 베스트셀러야 웬만한 독자들은 한 번쯤 읽어보거나 들어봤을 테지만, 이 책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안 팔렸다는 얘긴데, 썩 좋은 책이 먼지에 쌓여 있는 것처럼 편집자를 안타깝고 괴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나카지마 아츠시의 대표작들인 단편 ‘산월기’ ‘명인전’과 중편 ‘제자’ ‘이능’을 엮은 책이다. 나카지마 아츠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많은 작품을 내지 못했지만, 여기에 소개된 대표작 모두 중국의 고전 인물을 소재로 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반추하게 만드는 녹녹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번역 글과 이철수 화백의 판화 그림이 어우러져 여러 가지로 매력이 넘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독자로서 먼저 만나고 편집자로서 나중에 만난 보기 드문 책이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시절에 이 책은 내게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안겨 주었다. 사회 진출은 물론 변절과 의리에 대해서도 고민하던 그때 ‘이능’에 나오는 비운의 장수 이야기에 괴로워했고, ‘명인전’에서 활 쏘는 법을 잊어버린 천하 제일의 명궁 이야기에 유쾌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도 길지만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라는 ‘산월기’의 글귀에 사로잡혀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나의 경험으로 볼 적에, 이 책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위안이 되고 귀감이 되는 소중한 책이 될 것이다.

출판사에 들어와 지난해에 이 책을 다시 편집해 내놓았다. 그냥 묻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명작이기도 하거니와 청소년들에게 꼭 읽히고 싶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산월기’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명인전’ ‘이능’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제자’의 내용이 요즘의 학생들에게 적절할 듯해서였다. 대상을 청소년에게 맞추다 보니 표지와 판형이 바뀌었다. 청소년의 이미지에 맞게 밝고 선명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했다. 고전을 읽는 듯한 신영복 선생님의 번역 문체는 되도록 훼손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지나치게 어려워 보이는 한자말은 손을 보았다. 워낙 아끼는 책이라 잘 팔렸으면 하는 욕심에 이것저것 생각은 많았지만, 결국 조심스런 손질만 곁들이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새 옷을 갈아입고도 여전히 서점의 서가보다 출판사의 창고에 더 많이 쌓여 있다. 만들면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생각만큼 독자들에게 걸어 들어가지 못한 셈이다. 기대했던 만큼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얻은 것도 많다. 새로 만드느라 원고를 보는 동안 또 다른 글귀가 가슴에 와닿았다.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는 이징의 모습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내 모습을 보게 됐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질문과 감동을 주는 책. 짧은 내용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이 책의 감동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으면 좋겠다. 고은경/다섯수레 출판사 편집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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