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3 17:50
수정 : 2005.05.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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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문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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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18세기까지도 이를 당해내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를 포함하여 그때가지 유럽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과 전투에서 부상당해 숨진 사람보다 발진티푸스에 희생당한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계속돼온 비누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비누가 이를 이겼다. 그 결과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발진티푸스가 없어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때 동부전선에선 발진티푸스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 병은 그 뒤 혁명전쟁기의 러시아를 휩쓸었다. 1918-1922년 사이에 2천만-3천만 명이 이 병에 걸려 그 중 10%가 숨진 것으로 추산됐다. 혁명의 승패가 발진티푸스에 달려 있는 듯했다. 1919년 레닌은 외쳤다. “사회주의가 이를 몰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가 사회주의를 무너뜨릴 것이다.”
6세기와 14세기 유럽 중세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던 페스트가 유럽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얘기는 진부하다. 그리스가 로마에 패한 것은 말라리아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여주인공은 애인의 아이를 낳은 뒤 산욕열을 심하게 앓는데, 그 질병이 이야기 전개의 정점이자 전환점이 된다.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 주인공은 내반족이라는 기형 발을 가졌는데, 이는 그의 여러 행동과 열등의식을 설명해주는 결정적인 고리다. 만약 고흐가 자신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더라도 자화상만 보면 그가 정신질환을 앓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르네상스기의 유럽은 섹스 문제에 매우 관대했다. 창녀촌이 곳곳에 있었고, 감염된 사람들도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황제와 국왕, 귀족과 평민, 성직자와 학자, 시인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매독에 걸렸고,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 사실을 알렸다.
반세기도 넘긴 1942년에 나온, 질병의 사회경제사이자 질병을 통해 본 철학·종교·문학·음악·미술·과학·법률 등 인류문명에 관한 통사라고나 해야 할 <질병은 문명을 만든다>가 번역됐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의사학연구소 초대 소장 헨리 지거리스트가 쓴 이 책의 번역감수자 이종찬 교수는 “질병을 의학이 아닌 문명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저자의 탁월한 문제의식”를 높이 평가하면서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유용하다고 강조한다. 최근사들이 빠져 있어 아쉽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쉽고 잘 정리된 시각을 만날 수 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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