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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3 18:55 수정 : 2005.05.13 18:55

<문화와 제국주의>는 1995년 지은이 에드워드 W. 사이드의 방한에 맞춰 출간돼 국내 인문학계 젊은이들에게 문화 제국주의의 실상을 알려준 바 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2005년, 옮긴이와 출판사를 달리해 다시 나왔다. 새삼스레 왜일까.

옮긴이 박홍규 영남대 법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지은이가 비판한 제국주의에 침윤된 세계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 양상이 18~19세기 오리엔탈리즘보다 오히려 더 포괄적이고 철저하다,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한국이 최근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이중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특히 미국이 동양을 멸시하고 차별한 결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하고 북한까지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옮긴이의 말을 뜯어보면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절실함보다는 다른 쪽에 무게가 쏠려 있음이 행간에서 배어난다.

가장 도드라지는 이유는 역시 번역의 문제. 박 교수는 “이번에 완역하면서 보니 기존의 번역이 생각보다 심한 오역이었다”고 밝혔다. 사실 1995년판은 번역을 맡은 두 분의 고명함과는 달리 번역의 질과 관련되어 시비가 많았다. “두 역자의 편차가 드러날 정도로 최종 감수를 하지 않은 흔적이 보인다”, “오·탈자는 물론 비문으로 인해 해독이 어려운 문장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심지어 숙어를 축자적으로 옮겨 원어를 미루어 본래의 뜻을 유추해야 하는 사례가 있었다. 재번역에서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음과 함께 Decolonization을 ‘탈식민지’에서 ‘반식민지’로, Post-colonial을 ‘후기 식민지’에서 ‘식민지 이후’로 바꾸는 등 용어를 재정립했다.

오탈자 · 비문잡아 10년만에 다시 선봬
탈식민→반식민 등 일부용어 재정립도

박 교수는 또 사이드가 문단과 학계에서 여전히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며 그를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뜻을 펴고 있다. 그들만의 지적 유희로 그치고 있는 사이드를 ‘영문학에서 해방’시켜 모든 학문과 예술에서 논의가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셉 콘래드나 제인 오스틴처럼 제국주의적 작가가 판을 치는 영문학계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그는 “영문학을 신주 모시듯 하는 영문학과가 존재하는 한 반미를 말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이전 공역자 가운데 한 사람의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저자의 방한에 즈음해서야 졸속으로 번역된 것이 못마땅하다. 전작 <오리엔탈리즘> 역시 13년 만에 아마추어인 자신의 손을 빌려야 했음 또한 그렇다.

<양코배기야, 들어봐라!>, <흰둥이들아 들어봐라!>. 한꺼번에 나온 두 권의 책도 말하는 바가 지금도 유효하고 어쩌면 더 절실하다고 느껴 다시 다듬어 펴낸 경우다. 전자는 1960년 <들어라 양키들아>가 원저. 미국의 코 밑에서 쿠바혁명이 성공한 까닭을 현지인의 입을 빌어 말한다. 미국의 대쿠바 정책, 즉 군대와 상사를 앞세운 수탈정책과 무능부패 정권의 지원 때문이었다는 것. 후자는 1920년대 초반에 원저가 나와 <빠빠라기>라는 제목으로 국내 소개된 바 있다. 남태평양 사모아의 섬, 한 추장의 입을 통해 문명세계의 허구를 고발한다. “당신들은 빛을 준다고 믿을지 모르나 캄캄한 어둠으로 끌어넣으려 한다.”

두 책 모두 젊은이들한테 “니네들도 한번 읽어보라”고 던져주기엔 말투가 낡고 어색해 윤구병씨가 국내 출간된 책들을 두루 참고해 우리말에 맞게 번역냄새를 지워 펴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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