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3 19:13
수정 : 2005.05.1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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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백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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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본래의 형상과 표기의식을 보존하며 전승되기는 은나라 무정(武丁) 때부터 춘추 전기까지 600여년, 일러 갑골문·금문 시대다. 자연계의 정령, 죽은 자의 영혼, 여러 신들과 공존하였던 때다. 한자는 연원을 따져 말하자면 인간과 만물과의 교감체계였다.
일본의 한자학 최고 권위자인 지은이는 한자의 원형질이랄 수 있는 갑골문·금문을 통해 고대인의 사유체계와 동양철학의 뼈대를 읽어낸다.
예컨대 名(명)은 ‘저녁에는 입으로 이름을 말한다’로 풀이해 온 글자. 저자는 夕(석)을 제사상의 고기(肉)로, 口는 입이 아닌 축문을 담는 그릇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名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이름을 부여하고 조상 신령에게 보고하는 명명의례에서 말미암았다고 본다. 고대 제례의 반영이다.
또 隱(은:숨다)의 왼쪽 방은 阜(부:언덕)을 뜻한다고 간주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사다리로서 신이 하늘로 오르내리는(陟降:척강) 구실을 했다. 신은 하늘과 땅이 통하는 곳에 숨어서(隱) 살았다. 우리나라의 신성구역 소도 또는 솟대와 비슷하다. 이로써 除(제), 限(한), 阿(아) 등이 품은 뜻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奪(탈)은 금문에 옷(衣) 속에 새(推에서 手방을 뺀 것)가 그려져 있는 모양새다. 그 옷은 수의로 추정된다. 옷깃에서 새가 탈거한다는 것은 정령이 새 형태로 되어 육체를 벗어남을 표시한다. 고대인들은 일정한 계절이면 떼지어 고향의 물가로 돌아오는 철새를 조상의 신령의 화신으로 믿었다.
그동안 한자의 뜻풀이는 서기 100년대의 <설문해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설문해자>는 한자의 상형성을 추상보다는 구상(具象)에 가깝게 보았다. 그로 인한 오류 바로잡기는 지금부터 100년전 갑골문과 금문의 발견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한자 백가지 이야기>는 갑골문·금문에 해박한 저자의 안마당인 셈이다.
100개 항목으로 나눠 쓴 설명을 따라가면 한자 그 자체는 물론 그것에 얽힌 것들을 따라잡아 어렵다는 한자와 친근해질 수 있다. 이 책은 덕목은 저자의 해박함과 기술의 촘촘함이다. 그러나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통유산임은 인정하지만 한-중-일이 한자를 함께 쓰다가 표기방법이 분화하면서 감정의 골이 생겼으니 공통의 유산을 부활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부흥으로 가는 길이라는 저자의 인식은 무척 찜찜하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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