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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9 17:33 수정 : 2006.02.06 20:24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전쟁은 도자기 전쟁이며, 특히 차사발 전쟁이었다.”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한 왜군이 가장 먼저 일본으로 보낸 전리품은 김해 향교의 도자기 제기들이었다. 당시 전리품을 받고 기꺼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도 차완’으로 알려진 조선 사발을 최고의 차도구로 쳤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국보가 된 도자기 ‘기좌이몽 이도’를 직접 본, 조선 미술·공예에 각별한 이해와 애착을 표시했던 일본의 대표적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1889-1961년)는 말했다.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개성 따위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평범함의 극치다.…이 정도로 흔해빠진 물건은 없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다.”

도예가 신한균 사기장이 쓴 <우리 사발 이야기>는 야나기의 그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사기장이 이렇게 나선 것은 드문 일이거니와, 그는 나아가 16세기까지 중국과 더불어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도자기 생산 종주국으로서의 조선의 전통과 자존 회복을 부르짖는다.

그가 보기에 야나기 주장의 결론은 “그 더러운 조선의 잡기에서 미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우리 일본인들의 심미안은 위대하다”는 것이고, 일본 국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포함한 수다한 한국인들도 이를 별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황태옥’이라고 이름붙인 ‘이도 차완’은 처음부터 다도에 쓸 요량으로 제작한 차사발이 아니며 막사발(잡기)은 더더욱 아니라고 신한균은 단정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 애상의 미로 본 야나기 미학의 기둥이 무너지고 그의 말은 헛말이 된다. 그가 보기에 문제의 사발은 웅천 두동리 등 진주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일대, 백자 재료인 태토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진주부 지방 가마에서 민가의 제기, 즉 제사용 그릇으로 특별히 구운 것이다. 굽이 좁고 높으며 몸체의 아랫부분에서 굽 부분까지 급격하게 깎아내린 형태, 독특한 노란 빛, 아래 굽 언저리의 이슬 모양의 유약 응결인 유방울(가이라기) 등 ‘이도 차완’의 특징은 재료인 흙, 유약, 불때기 등을 미리 계산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말하자면 야나기가 주장한 무의식 무작위의 효과가 아닌 작위적이며 의도된 것이다. “미학적 파격을 통해 한민족의 얼을 승화시킨 명품”이며 “자연미를 추구하던 조선 사기장의 의도적 창작행위”인 것이다.

도예가들의 파격적 창작을 통해 제수용으로 특별히 구워낸 ‘명품’
평범함이 위대함이라는 주장은 일본식 미학에 빠진 식민사관일 뿐이다


그는 그것을 그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을 들락거리며 문제의 ‘명품’들을 여러차례 직접 보고 만져도 봤고, 무엇보다 ‘회령 유약’을 국내 최초로 재현해내는 등 조선 사발 재현의 최일선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의 실적과 감각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조선과 일본 중국 도자기의 역사, 조선 사발의 고향들, 조선 제기의 변천사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400여컷에 이르는 수록 사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기 드문 볼거리인데다 그런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적절한 장치이기도 하다.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사진 속의 ‘기좌이몽’ 등 조선 황태옥 사발의 자태는 빼어나다.

그는 이런 전통 조선 사발을 처음으로 재현해낸 도예가 신정희씨의 아들이기도 하다. 사금파리를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녀 ‘그릇귀신’이 붙었다는 소리를 들었던 부친 신씨는 고행 끝에 조선 사발을 재현해놓고도 그것을 ‘막사발’이라고 언론에 말한 것을 일생의 실수로 여기며 “큰아들(저자)이 ‘막사발’의 오명을 벗겨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저자의 도전은 2대에 걸친 가문의 과업이기도 한 셈이다.

“막사발이란 명칭 속에는 무서운 식민지 지배논리가 숨어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발을 확실히 연구하고 분석하여 식민사관에 따라 기술된 우리 사발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함에도 그저 일본인이 저술한 책을 보고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고 있다. 또한 어설픈 번역을 통해 우리 사발의 미학을 일본식 미학에 짜맞추고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사발 연구가들 중 일부는 식민사관에 빠져 우리 사발의 가치를 낮게 보고 일본 것을 중시한다. 이 때문에 도공이니 차완이니 하며 용어도 모두 일본 용어를 쓰고 있다. 나는 우리 사발의 국수적인 미학논리도 부정하지만, 우리 사발에 대한 식민사관은 더욱 더 부정한다.”

고비키, 이라보, 하케메, 이도, 도도야…, 도자기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 쓰는 말들인데, 옛 조선 사발의 일본식 분류명이다. 언제부터인지 사기장이 도공으로, 사기그릇이 자기로, 사금파리는 도편으로, 가마는 요, 흙가래는 코일로 불러야 유식한 것처럼 돼버린 현실을 저자는 아파한다.

체험을 토대로 한 재료흙과 잿물(유약), 그리고 불때기에 관한 실감나는 기술, 일본에 납치된 조선 사기장들과 차 얘기도 눈여겨볼만하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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