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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9 18:38 수정 : 2006.02.06 20:19

말 글 찻집

공자는 <춘추>에서 자기 나라(魯) 흐름을 짚으면서, 마지막 왕을 ‘애공’(哀公)이라고 기록했다. <춘추> 15권이 ‘정공’(定公), 마지막인 16권이 ‘애공’으로 되었다. “14년 봄 정월에 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떠났다. 기린이 나서니 이를 쏘아서 잡았다”( … 十有四年春, 西狩獲麟)고 적고, 16권 첫머리 ‘公’ 위에 ‘哀’를 써넣고는 붓을 던졌다.

이로써 “후세 사가들이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 나오거든 ‘哀’ 자를 붙여 그 책임을 물으라. 왕에게 책임을 묻는 이름을 ‘사호’(史號)라 하느니”가 ‘춘추대의’로 되었다. ‘공’은 후대에 ‘왕’으로 된 것이다.

철종을 이은 임금(희)이 나라이름을 바꾸고 뒤에 왕권까지 왜인에게 넘겼다. 일본귀족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숨졌다. 그가 숨진 뒤 ‘사호’를 정한 역사가가 있다. 그 선비가 노석 려구연(1865~1938)이었다. ‘이태왕’ 사호를 ‘비애왕’(悲哀王)으로 한다고 했다.(노석집2. 비애왕사기) 그는 공맹학도로 조선학자였다.

‘노석’이 “그 왕의 사호는 ‘비애왕’이 옳도다. 나라이름(조선/대한제국)을 바꾼 것이 ‘비’(悲)이고, 왕권을 왜인에게 넘겨준 것이 ‘애’(哀)이다”라 했다.

1926년 4월25일에 ‘이왕’(李王)이 타계했다. 비애왕 아들이 일본귀족 ‘이왕’으로 되었다. 일본에서 그에게는 곧장 ‘순종’이라는 묘호가 건너왔다. 그에 대한 사호가 ‘치루왕’(恥淚王)이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일본 귀족이 되어서도 분격하지 아니한 것이 ‘부끄럽다’(恥)고, 나라땅을 잃어버린 것이 ‘눈물’(淚)이다”(노석집2, 치루왕사기)라는 것이다.

‘이태왕’이 숨지고서(19년 1월22일) 3월1일 만세소리에 다급해진 총독 ‘장곡천’(하세가와)과 ‘완용’이 묘호를 ‘고종’(고종)으로 지었으나, 왜왕이 묘호 불가를 통고했던 것으로 추리되었다. 비애왕은 ‘명정’에 ‘이태왕’으로 기록돼 묻혔다. “소상 때 위패에도 이태왕으로 기록했다가, 대상 때는 기제사 때만 위패에 ‘고종대왕’으로 기록하고, 다른 곳에서는 ‘이태왕’으로 기록하라”는 지령이 온 것이다. 묘호를 줄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사실들은 여지껏 숨었던 얘기다.


나라땅을 왜왕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공포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이가 ‘치루왕’이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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