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9 19:57
수정 : 2005.05.1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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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토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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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스스로 ‘용의 후예’라 즐겨 말해왔다. 그러나 중국인이 ‘용의 후예’가 아니라 ‘늑대의 후예’라는 주장을 담은 매우 독특한 소설 한 편이 대륙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본디 작가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자인 장룽(59)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 쓴 <늑대 토템>(장강문예출판사)이 그것이다.
작가 장룽은 출판사가 마련한 인터뷰 자리에서 사진 촬영도 거부하고 개인 배경을 일체 비밀에 부쳐 신비한 인물로 떠올랐다. 예명임에 틀림없는 장룽(姜戎) 또한 서북 초원 오랑캐겨레인 강족과 서융족에서 한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가 왜 서북 오랑캐 이름으로 예명을 삼았는지는 곧 드러난다.
작가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작품의 내용보다 그 탄생 배경을 먼저 설명하는 편이 낫다. 이 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실제적 ‘유목 체험’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문화대혁명이 터진 이듬해인 1967년 21살이던 베이징의 지식청년 장룽은 자원해 내몽골 어룬 초원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11년 동안 노동했다.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1978년 장룽은 고향인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초원에서 일하던 시절 ‘초원의 혼’이라 불리는 은빛 늑대 무리의 생존방식에 깊이 매료당한 그는 이후 ‘초원 늑대의 모든 것’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출간돼 지금까지 대륙에서 50만부가 팔려나간 이 책은 작가의 개인적 극한 체험과 오랜 세월의 연구 성과가 녹아들어간 독특한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장편소설은 베이징에서 내몽골 어룬 초원으로 지원해 내려온 지식청년 천전이 주인공이다. 작가의 분신인 천전은 우선 초원에서 만난 몽골 유목인 비리거 노인으로부터 초원의 생존 법칙과 지혜를 배운다. 그는 천전에게 “사냥을 배우려거든 먼저 인내를 배워야 한다”, “하늘 아래 기회란 오로지 인내심을 지닌 사람과 짐승만이 똑바로 알아볼 수 있다”며 유목민족이 초원 늑대와 수천년 동안 투쟁하며 얻어낸 지혜를 전수한다.
비리거 노인보다 천전에게 더 심오한 초원의 생존법칙을 깨우쳐준 존재는 초원 늑대 그 자신이다. 천전은 새끼 늑대 한 마리를 사로잡아 기른다. 그러나 사로잡힌 건 늑대가 아니라 천전이다. 천전은 그를 기르면서 늑대가 지닌 용감함, 지혜, 인내심,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 영원히 굴복하지 않는 완강한 정신력, 극한 환경에 터럭하나 꿈적하지 않는 도도함 등 늑대의 강인한 자아에 사로잡힌다. 새끼 늑대를 숭배하기에 이른 천전은 종처럼 그의 시중을 들며 늑대의 강인함과 지혜를 배운다.
천전은 늑대에 대한 관찰에서 중화민족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비약한다. 그것은 화하민족(중화민족) 또한 본래는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민족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지은이는 작품의 후반부 40여쪽에 ‘늑대 토템에 관한 강좌와 대화’라는 보론을 덧붙여 “화하민족은 본디 서북 초원 일대에서 발상한 유목민족이었으며, 황허 유역으로 이동해 정착하면서 농경민족으로 변했다”며 “서북 고원과 초원은 중원의 아버지, 황허는 중원의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창조해낸 생업의 형태를 수렵, 유목, 농경, 상업, 항해, 공업 등 여섯 가지로 정리한 뒤, 이 가운데 “오로지 농경만이 자급자족적이고 폐쇄적이며 경쟁과 교환과 이종교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농업 이외에 다른 다섯 생업은 모두 격렬한 생존경쟁을 요구하기 때문에 평화적이지 않다. 그는 중국민족이 농경문화에 젖은 게 모든 ‘중국병’의 화근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중국민족이 부흥하는 길은 본래 지녔던 유목민족적 야수성을 회복하는 게 관건”이다. “한족은 유목민족을 천시했으나 이는 자기 근본과 조상을 망각한 행위”이며 “한족의 혈관에 흐르는 늑대의 야성적 피야말로 중화민족 부흥의 자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농경문화로 인해 나약해진 중국이 끊임없이 유목민족의 침략을 받은 것을 ‘텅거리(몽골어로 하느님)의 섭리’로 해석한다. “일단 화하민족이 농경 환경에 젖어 연약해지면 신은 늑대의 생리를 지닌 유목민족을 보내 화하민족을 때림으로써 강인하고 진취적인 늑대의 피를 수혈시켜 화하민족이 새롭게 떨쳐 일어나도록 했다. 농경문화에 젖은 연약한 동생이 바로 서지 못할 때 강인한 형은 중원으로 들어와 중국의 절반 또는 전체를 차지해 동생이 맡았던 사직을 대신하고 화하문명을 유지해왔다.” 유럽인들이 유목민족의 침략에 붙여준 별명인 ‘신의 채찍’ 논리를 지은이는 중화주의를 재구성하는 재료로 동원한 것이다.
<늑대 토템>은 한마디로 중화주의의 신약전서다. 장룽 이전의 중화주의가 ‘농경민족 선민사상’에 기초했다면, 장룽은 중원을 파괴해왔던 유목문화를 중원문화의 구성부분으로 흡수함으로써 중화주의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지은이는 ‘정복왕조’를 중국사에 포함시킬 때마다 따라다니는 모순을 깨끗이 해결했다. 우리는 여기서 늑대보다 더 게걸스런 중화주의의 탐욕을 날것 그대로 만난다.
이 책은 패권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극우적 세계관과 통한다. 논리적 설득보다 대중소설의 형태로 중화주의를 선동하고 자극한다는 점에서 더욱 위태롭게 읽힌다. <늑대 토템>이 인간 본연의 야생성과 유목정신에 대한 찬가에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아마도 세기적인 걸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노마디즘(유목주의)을 중화주의에 접목시킴으로써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중국 속담을 실증하는 사례를 하나 더 보태는 데 그쳤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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