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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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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바탕 현지조사 그리스 · 아시아 문화사
문학적 전통 복원 흐름속 ‘서양사 아버지’로 명예회복 %%990002%% 전 9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탐구하는 전쟁사라기보다는 그리스와 아시아 여러 지역의 기후, 지리, 풍토, 풍습, 종교 그리고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일종의 세계문화사다. 그는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동서양 문명의 충돌로 파악했다. 페르시아인은 일인의 군주에 예속된 노예지만 그리스인은 오직 법에만 종속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에, 일인의 자유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처럼 썼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을 전제와 자유, 야만인과 문명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최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로 이어지는 ‘오리엔탈리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우월주의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동서 문화를 비교했다고는 볼 수 없다. 문화는 분명 민족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반드시 우열의 위계질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개별적 차이들을 일반화하지 않고 그 차이들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밝히는 데 관심을 집중시킨다. <역사의 종말>을 썼던 프랜시스 후쿠야먀 말대로, 인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열차에 탑승한 승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일반화로 각 기차에 탑승한 승객들의 삶의 의미가 말해질 수는 없다. 역사가는 각각의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집단 기억과 경험을 탐구 조사해서 이야기하며, 이런 이야기를 처음으로 했던 ‘역사의 아버지’가 바로 헤로도토스다. 헤로도토스는 여행을 통해 현지에서 들은 얘기거나 수집한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확성과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들은 얘기의 대부분이 구비전설이거나 풍문 또는 전승이기 때문에 정보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며, 입수한 문헌자료도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지 못하는 부분적인 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2권에서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의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라고 했던 반면, 제7권에서는 “내 의무는 전해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역사서술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이 원칙을 그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대한 탐구에 적용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학자들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페니키아인에게 있다고 보고 있다”는 말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기존의 학설을 제시하면서 그것과 논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시기를 살았던 그가 입수할 수 있었던 사료는 대부분이 구술자료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여행을 통한 현지조사로 당시 최대의 세계사적 사건인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 이전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역사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최초의 역사가에게 문헌자료의 빈곤은 원초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기보다는 거짓말쟁이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그는 오늘날 사회과학적 역사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는 역사인류학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교과서적인 공식 역사에 대항해 민중의 기억 속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는 구술사가 재등장했다. 기억과 역사 사이의 투쟁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시기부터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문자문화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면서 구술사는 과학적 역사의 영역에서 추방됐다. “미디어는 메시지(message)”라고 했던 맥루한은 다른 한편으로 “미디어는 마사지(massage)”라고 말했다. 문자로 씌어진 사료와 역사는 과거의 진실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진실을 변형시켜서 기존의 권력담론의 재생산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날 구술사가들이 주장하듯이, 구술역사는 문자역사의 권력담론을 해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구술사에 대한 이런 재평가와 더불어 우리는 서양 역사 아버지로서의 헤로도토스의 사학사적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자고로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삶의 오리엔테이션을 기대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쓴 이유도 과거 위대한 인간들의 업적을 잊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인들에게 삶의 오리엔테이션을 주기 위해서였다. 자기 시대를 위기로 인식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역사에 더 높은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전문화된 역사학이 전문가들끼리만 소통하는 역사를 생산하고 대중을 소외시킴으로써, 대중은 역사에 대한 욕구와 열망을 텔레비전 사극으로 충족한다. 따라서 오늘날 대중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역사가는 운명처럼 주어진 자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게 해주는 헤로도토스와 같은 ‘생의 교사’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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