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9 20:30
수정 : 2005.05.1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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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시집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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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39)씨의 네 번째 시집 <춤>이 창비에서 나왔다.
시집 제목은 ‘춤’인데, 시집에는 빛에 관한 시편들이 차고 넘친다. 빛과 춤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 빛은 곧 ‘시간의 춤’이 아닐 것인가. 끊임없이 떨리면서, 그 떨림을 동력 삼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움직임을 빛의 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시집의 표제작은 딱히 시간을 노래한 것이 아니고, 시간에 관한 시편들에서 춤의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춤이라 한다면 느리고 절제된 동작으로 시종하는 일본 춤극 ‘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먼동이 튼다/강물이 언 줄도 모르고/오리는 빛이 쏟아지는/저쪽을 바라본다//물을 젓던 갈퀴를/그대로 강물 아래 놓고/불안의 긴 목을 빼든 채/눈발 사이에 떠 있는 빛 같은/털을 바람에 흩날린다”(<오리>)
“가을의 첫 잎을 따/창호지에 바른 국화는/빛이 스며드는 종이 속에서 누렇게 바랬고/그늘은 방바닥에/발뒤꿈치에서 깎아낸 굳은살처럼/얇게 일렁이는데./아버지 노래를 부른다./자식들 대신 침묵 속에 고치를/틀고 있는 아버지,/저녁빛을 바라보며/청년의 노래를 부른다.”(<생일>)
춤이 요란하지 않은 것처럼 빛 역시 휘황하지는 않다. 새벽이나 저물녘에 만날 수 있는, 은은하게 번지는 빛이 시집에는 편재해 있다. 시집을 뜯어 보면 빛의 최대치는 오히려 죽음과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을 통상 어둠과 암흑으로 묘사하는 발상법과 다른 이런 면모 역시 박형준 시의 큰 한 특징이다.
“스프링이 뚫고 올라온 틈에서/날카로운 생으로 주저앉고 있는 의자가/자신의 봄을 위해 기지개를 내뻗었다./찬란한 마지막 호흡이 의자의 죽음을 완성했다.//다음날 새카만 개미들이, 플라타너스에서 맑은 빛을 등에 지고 내려와 삐져나온 솜뭉치 속으로 날랐다.”(<봄>)
박형준 시가 쇠락과 소멸의 정조를 주로 삼으면서도 절망이나 분노에 먹히지 않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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