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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종 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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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서 미쳐 도는 세상과는 달리
대학은 좀더 근원적인 인간 가치를 섬기고 살아가는
장소임을 시늉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최근에 국내 제일의 대기업의 총수가 모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는 대기업 최고 경영자에게 명예학위를 줄 만하다고 판단한 대학의 결정 자체를 시비하고 싶지 않다. 만약 세간의 추측대로 그 명예학위가 개교 100주년 기념관이라는 값비싼 건축물을 기증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방해로 학위수여식의 원만한 진행이 불가능했던 데 대한 ‘사죄의 표시로’ 대학본부의 보직교수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지난 30년간 대학에서 녹을 받아 먹어온 처지에, 내가 한국의 대학의 실정을 모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토록 허약하게 대학이 최소한의 권위도, 체면도 헌신짝처럼 집어 던질 줄은 짐작도 못한 일이다. 만약 학생들의 방해로 손님에게 결례를 했다고 생각하였다면 총장의 정중한 사과 한마디로 충분한 게 아닌가. 아무리 대학이 이름뿐인 껍데기가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돈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서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는 달리 대학은 좀더 근원적인 인간가치를 섬기고 살아가는 장소임을 시늉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대학이 왜 있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소란을 피운’ 그 학생들이 그날 이후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동료 학생들에 의해서 심한 비난과 매도를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갈수록 취직이 어려워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대기업의 전횡에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고 해서 그 소수 학생들이 딴 사람도 아닌 다수 동료들에게서 이처럼 적대시되고 따돌림을 당한다는, 이런 현상은 예컨대 1970-80년대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의 대학은 비록 정치적 억압으로 인한 긴장과 좌절로 짓눌려 있었지만, 반독재 민주화라는 대의(大義)를 둘러싸고 학생들 사이의 공감과 우정은 살아 있었다. 슬픈 일이지만, 혹심한 정치적 억압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인간정신이 상인적(商人的) 멘털리티가 활개치는 상황에서는 뿌리로부터 마멸된다는 것은 티베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인간다운 도리와 정의와 존엄성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하기는, 지금은 현직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대학은 산업”이라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게 허용되고 있는 경제지상주의의 시대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의 정식명칭도 어느새 ‘교육인적자원부’로 되어 있다. 국가는 이 나라에 존재하는 인간은 다만 ‘인적 자원’이며, 인간 아닌 것들은 ‘자연적 자원’일 뿐이라고 결정했다. 이제 이 땅에서는 ‘인간’도 ‘자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유대와 교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이 자유주의 경제의 추동력이라고 생각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그것이 오히려 전체의 이익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경제가 제 기능을 하려면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불가결하다고 그가 역설한 것은 지금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다. 그는 개인의 이익추구만이 장려되면 그 결과는 야만적인 사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감정’이 오히려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으로만 되어 가는 이 기괴한 상황이 자유주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찬미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담 스미스는 뭐라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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