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9 22:05
수정 : 2005.05.19 22:05
|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
세설
이건, 더 불합리한 쪽이 지는 논리게임이 아니라, 더 이기적으로 보이는 쪽이 지는 상징게임이다. 이 땅에서 이기적이란 판정은 곧 패배를 뜻한다. 모든 경제주체는 반드시 이기적이어야 하는데…“거참~희한하네”
1.
쌈이 났다. 난 쌈이 좋다. 재밌잖아. 뒷짐 지고 구경했다. 구도는 노예계약 vs 배은망덕. 규모는 스펙터클. 노예해방을 요구하는 을은, 갑이 방송출연을 무기로 강압적 계약체결을 했단다. “한 사람씩 방에 불러 서명 안 하면 공연은 물론 방송출연도 못하게 하겠다”고. 배후세력을 언급하는 갑은 계약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의가 중요하단다. 계약금을 주지 않은 이유는 “계약금을 주면 연기자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 돼서고. 그게 그런 거야?
2.
계약이란 게 애초 협박전이다. 상대 욕망을 인질로 자신 이익을 담보하겠다는 수작. 그게 본질이다. 갑의, 방송출연 못하게 하겠다는 강압이 실재 했다면, 촌스럽긴 해도, 정공이다. 을 스스로의 출연욕구가 그 협박 작동의 전제니까. 반대로 지명도를 지렛대로 자신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니 떠나겠다는 을의 협박도, 그것대로 정공이다. 을 협박의 효용은, 을을 통한 이익에 대한 갑의 욕구에 비례하니까. 양자 관계 본연의, 정당한 급소들이다. 문제는 그 협박의 도와 시가 상궤를 벗어났을 경우. 발굴했다는 이유만으로 선투자분을 회수하고 감당했던 리스크를 보상받을 수준을 넘어 노예상인 만큼 갑의 욕심이 과도했는지, 아니면 갑의 인프라와 커넥션을 이용했으면서 더 나은 조건을 위해 투자회수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가겠다는 을의 뻔뻔함이 문젠지, 그건 알 수 없다. 속사정은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 여기서부턴 ‘으리’ 아니면 법이 풀 일이다.
3.
내가 이 쌈 구경이 재밌는 이윤 따로 있다. 을은 이것이 “돈 문제가 아니라 비인간적이고, 전근대적 매니지먼트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함”이며, “인간적 환경에서 개그만 전념할 수 있다면 돈 한 푼 못 받아도 괜찮다” 말한다. 갑은 모든 것이 “매우 큰 배후세력의 음모”이며, 동시에 자신 “부덕의 소치”라 말한다. 그럴 수 있다. 정말 돈 한 푼 못 받아도 괜찮을지도 모르고, 정말 배후세력의 음모가 있을 지도 모른다.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돈 때문이기도 하다, 고 말하지 않는다. 호. 재밌다. 계약관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우선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쌈에선 각자의 이기심이 동인으로 보여선 결코 아니 된다. 둘 다 그걸 매우 잘 알고 있다. 해서 생뚱맞게 시뮬레이션 된 전선은, 시스템의 전근대성 vs 배후세력의 음모. 후방은 ‘비인간적’이란 측면공격과 ‘부덕의 소치’란 심리전술이 각각 담당한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간파한다. 결국은 돈 때문이라고. 그리고 판독하려 한다. 어느 쪽이 ‘사천’을 땡겨 달라 했는지. 이건, 더 불합리한 쪽이 지는 논리게임이 아니라, 더 이기적으로 보이는 쪽이 지는 상징게임이다.
4.
이 땅에서 이기적이란 판정은 곧 패배를 뜻한다. 해서 파업의 전위는 항상 ‘민주’나 ‘인권’이 선다. 그러나. 그래봐야 공격은 어김없이 후방에 엄폐해둔 ‘정당한’ 이기심에다 곡사로 쏟아진다. 파업과 이기주의는 그렇게 동의어다. 그래서 더욱 죽어라 ‘민주’와 ‘인권’에 매달려 본다만, 소용없다. 서로 숨기고, 간파하는 지점이 뻔하다. 희한하다. 모든 경제주체는 반드시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은 누가 대신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떤 경제주체를 이기적이라 공격하는 게 마땅하려면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 누군가 대신 그들 이익을 보장해줘야 한다. 혹은 공격하는 자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던가. 그러나, 누구도 제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포기한 이익을 대신 건사해주지도 않는다. 이해가 엇갈릴 때 이기적이 되는 건 그래서 욕심이 아니라 권리다. 그런데, 우린 이기심 그 자체가, 공격대상이다. 희한하다. 악상이 떠오를라 그런다.
5.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불가능성에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존재할 수 없어야, 종교가 산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돌아간다. 종교의 음모. 우린 개인의 이기를 말하는 건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곤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한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혼란 비용을 지불하느니 죄책감으로 갈등 자체를 원천봉쇄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중재의 수고를 덜고, 혹여 실패하는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우리 그 분은 그렇게 오셨다.
6.
<한겨레>의 원고료가 너무 짜다 말하면 형편 어려운 민주언론인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 욕하는 자, 다 죽여버리겠다! 쩌퍼 쩌퍼.
딴지일보 총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