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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6 16:26 수정 : 2005.05.26 16:26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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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이라 함은 팝이 외래종임과 한국 팝이 이식문화임을 뜻한다. ‘팝’이 아닌 ‘한국 팝’이라 함은 팝이 더이상 생짜 외래종이 아님을 말한다. <한국 팝의 고고학 1960>과 <〃 1970>은 서양의 팝이 한국문화의 자장에 들어와 내재화하는 과정에서 삐걱거림 또는 파장의 기록이다.

‘고고학’이란 표제는 이 작업이 △자료 발굴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거쳤다는 점, △계보를 밝히거나, 신화화한 게 아니라 사실을 드러내고 감별하는 작업이었음을 표나게 한다. 증거물들은 흩어져 있거나 묻혀 있고, 연주자들 역시 늙고 쇠진해 기억이 엷어지는 판에 한국 팝은 이들 지은이를 만나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었다.

책에서는 한국 팝의 연대기적 사건을 크게 세 개를 꼽는다. 1954년 일본에 있던 미8군 사령부의 용산 이전, 1960년 초 일련의 민간방송 개국, 1975년 ‘대마초 사건’이 그것이다.

‘한국 팝’ 이전의 ‘팝’은 미8군과 동의어. 미군병사의 여흥을 위한 미군클럽이 난립한다. 화양흥업 등 연예기획사들이 잇따라 설립된다. 여기서 키포인드는 3~6개월 단위로 오디션을 했다는 것. 미 국방부에서 파견한 음악전문가가 심사를 하면서 연습을 게을리했거나 흥행성 없으면 여축없이 탈락시켰다. 따라서 쇼단은 맹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고 관중과 호흡하는 기술을 배운다. 하지만 미8군 무대는 일종의 섬. 따라서 미8군 무대에서 익힌 실력을 일반무대에서 펼친 손석우는 아무리 기려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청실홍실’ ‘나 하나의 사랑’ 등 창작곡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60년대 초 민간방송의 개국은 일종의 넓은 멍석. 미8군 무대가 시들해지고 한국연예협회가 창립된 것과 맞물려 미8군 무대와 일반무대의 칸막이가 완전히 없어진 셈이다. 트위스트와 로큰롤이 유행하고 캄보 밴드와 기타리스트가 출현한다. 특이한 것은 김 시스터스, 봉봉 사중창단, 블루 벨스 등 남녀 보컬팀이 쏟아졌다는 점. 지은이는 민방 개국과 군사정권이 도시가족의 형제·자매애를 부추기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어 노래도 하고 연주도 하는 보컬 캄보가 등장하고, 1964~65년 비틀스 선풍과 관련해 바보스 등 30개 이상의 악동들이 활동한다.

외래종인 팝은 내재화 과정에서 크게 세개의 사건을 겪는다
미8군 사령부의 용산 이전
60년 초 민간방송국 개국
75년 대마초 사건이 그것이다


지은이는 펄 시스터스, 김추자 등 신중현 사단의 출현을 ‘팝 혁명’이라고 말한다. 가창력에 미모에 댄스까지 삼위일체형 펄 시스터스와 김추자의 노래가 대유행했다. 콘텐츠(신중현 작곡), 홍보후원(팝칼럼니스트 서병후)에 레코드 취입(킹 레코드 박성배)이 뒷받침됐다.

70년대는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 75년이 분수령. 전반부가 팝 혁명이 문화·산업적으로 절정에 이르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국가의 억압과 시장의 강제 아래서 생존자들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시기다. 70년대 초는 시비에스 피디 김진성 사단의 독무대. 김광희, 김민기, 양희은, 조동진, 현경과 영애 등이 그들이다. 김민기는 한국 포크를 확립한 동시에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때 박정권은 가요정화 운동과 퇴폐단속 조처로 청년문화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소울·사이키와 포크가 합성된 신중현의 ‘폭송’, 조용필의 출현, 72년 10월 유신, 잇단 긴급조치 발효, 트로트 된서리에 따른 포크 빅뱅 등 시국의 긴급한 전개와 함께 한국 팝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클라이막스는 75년. 한국판 슈퍼그룹인 ‘엽전들’과 ‘검은 나비’. 223개 국내곡 금지조처,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 이정선 등 불온 음악인 지목. 그리고 12월4일. 신중현이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김추자 등과 함께 대마초 혐의로 구속된다. 숨가쁘게 달려온 팝이 절정의 순간에 융단폭격을 당하는 상황에 놓인다. 아! 대마초. 지은이의 탄식은 안타까움의 표현인 동시에 팝이 비로소 이식문화의 껍질을 벗고 한국 팝으로 내재화했음을 보여주는 감탄사로 들린다.

한국 팝은 불황의 긴 터널에 지나 77년 산울림을 만난다. 그 음악은 신중현 음악의 몇몇 측면을 확대·강화한 것이다. “대마초 파동 이후 신중현 산맥 주위에 철조망이 쳐지고 입산금지 푯말이 걸려 있는 이 거대한 공백에 산울림은 하나의 울림을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3개의 큰 획 사이에 수많은 사건과 등장인물이 촘촘히 엮여 무협지 같이 후르륵 읽힌다. 800여컷과 41명의 육성도 듣고볼 거리. 행간에서 울리는 가락은 옛기억과 다름 없는데, 인터뷰 사진들은 너무 늙었다.

지은이 가운데 신현준씨는 책을 쓰면서 △김추자 간첩설은 매니저였던 소윤석씨의 언론플레이였다 △조동진이 쉐그린에서 활동했다 △이수만이 들개들의 멤버였다 △팝 칼럼니스트 서병후씨가 최초의 고고클럽인 니르바나를 만드는데 간여했다는 사실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미8군 무대에 선 김대환 사진, 전인권의 데뷔 무렵의 빽판, 윤시내의 활동 초기 사계절 때의 앨범, 1971년 선데이서울컵 보컬그룹 참가 당시의 김트리오(최이철, 김대환, 조용필) 사진. 71년 청평페스티벌 참가 때의 김민기 사진 등을 발굴했다고 말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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