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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욱 서울대 교수 · 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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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와 레닌
뉴턴은 그의 대작 <프린키피아>(1687)에서 세 가지 운동법칙과 만유인력을 도입함으로써 우주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렇지만 조화로운 뉴턴의 세계관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다. 19세기에 빛의 파동이론이 등장했고, 19세기 전반부에는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법칙이 발견되면서 에너지 개념이 부상했다. 또 곧바로 자연계의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이 만들어졌다. 물리학자들이 이런 열역학 법칙들이 얼마나 근본적인 자연법칙인가를 놓고 논쟁하고 있을 때, 분광학의 연구는 원자가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였던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 1838-1916)는 이러한 혼란기에 과학의 토대를 다지는 데 작업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17살에 비엔나대학에 입학해서 22살에 전기 실험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실험물리학자로 과학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렇지만 마하는 이미 이 무렵에 인간의 감각, 지각,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물리학을 하면서 점차 실험생리학과 실험심리학에 몰두했다.
마하는 26살이 되던 1864년에 그라즈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고, 3년 뒤인 1867년에 프라하대학의 실험물리학 교수좌로 자리를 옮긴 뒤 이 대학에서 28년 동안 재직했다. <역학의 발달>, <감각의 분석>과 같은 마하의 논쟁적인 저술들을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그는 1895년에 비엔나대학의 과학사철학 교수에 초빙되었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1901년에 은퇴했다. <지식과 오류> <공간과 기하학> 등의 저서는 은퇴 후에 저술한 것들이었다.
19세기 과학계 ‘셜록 홈즈’
마하는 당시 물리학에서 무엇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를 지적하는 데 탁월했지만,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을 거부하는 성향이 너무 강한 나머지 원자론, 분자론,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이 당시 물리학의 놀라운 성과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하는 에너지 보존법칙도 사람이 만들어낸 “관습” 정도에 불과하다고 그 절대성을 부정했다. 남들은 의심 없이 받아들이던 이론을 계속 의심하고 새로운 설명을 찾아보려 했다는 의미에서 마하는 당시 과학계의 ‘셜록 홈즈’라고 할 수 있다.
실험물리학자였던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험적 사실을 가장 신뢰했으며, 그 다음이 개념, 관찰의 순이었고, 마지막으로 이론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다. 만약에 한 가지 사실을 두 가지 이론이 모두 설명한다면, 어차피 두 이론 모두가 관습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하는 이 중에서 우리의 생각을 더 “경제적”으로 만들어 주는 이론을 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마하가 주창했던 “생각의 경제성 원리”였다.
실험물리학자 마하는 모든 이론에 회의적 태도
마하의 뉴턴 비판은 아인슈타인에 영향 미쳐
레닌은 감각 철학을 유물론 근간 흔들 반동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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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른스트 마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비롯해 당시 모든 물리학 이론을 비판했고 뉴턴마저 부정했다. 마하의 주장은 젊은 아인슈타인이 뉴턴 체계를 허물어버린 상대성 이론을 만들 때 영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레닌은 주체와 객체를 동일시하는 마하의 관념론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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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는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이론적 언술을 과학에서는 수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통 실증주의자(positivist)라고 불린다. 또 그는 종종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경험과 측정을 강조했다는 점 때문에 도구주의자(instrumentalist), 경험론자(empiricist)라고도 불린다. 경험과 관찰을 강조한 마하의 철학은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을 출범시킨 비엔나서클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비엔나학파는 초기에 스스로를 ‘에른스트 마하 학회’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마하의 영향은 슘페터와 같은 경제학자, 아들러와 같은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지대했다.
이론에 대한 마하의 비판의 칼날은 뉴턴에까지 미쳤다. 그는 뉴턴이 주장했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비판하고 부정했으며, 물질의 관성질량(m=F/a)이 뉴턴이 주장했듯이 물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그 물체와 우주의 다른 모든 물체의 연관에서 비롯되는 양이라고 주장했다. 마하의 대담한 주장은 뒤에 학창 시절의 젊은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아인슈타인이 뉴턴 체계를 허물어버린 상대성 이론을 만들때 영감으로 작용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론에 대한 논문에서 마하를 직접 언급했으며, 자서전에서 “마하의 타협 없는 의심의 정신과 독립심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았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이론 체계를 뛰어넘는 더 거대한 이론 체계인 상대성 이론을 세우기 위해 마하의 뉴턴 비판을 수용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론을 거부한 마하의 인식론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모든 이론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마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대성 이론의 원조 격으로 간주되는 데에도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인식의 기초로서 인간의 감각을 강조한 마하는 1886년에 출판되고 1901년에 개정된 <감각의 분석>에서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감각을 총체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각과 지식의 총체가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마하에 의하면 색깔, 소리, 온도, 시공간만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물질 등도 전부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에 불과한 것이었다.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외부적인 감각 요소들은 인간의 내적인(즉 심리적인) 감각 요소들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이것들에 의해서 변형되기도 했다. 이런 상호작용 때문에 마하의 감각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마하2’등 음속배수 개념 창시
마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반론을 편 사람은 철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니라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었다. 당시 마하의 사상은 알렉산더 보그다노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와 같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고, 특히 보그다노프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신이나 물질 중 어느 하나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이 둘 모두가 경험의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대한 주체의 개입을 강조하는 “경험 일원론”을 제창했다. 이들은 볼셰비키당의 유물론을 인간의 경험과는 무관한 “물자체”를 상정하는 칸트의 이원론이라고 비판했다.
레닌은 이와 같은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근간을 흔드는 반동이라고 간주하고, 1909년에 출판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하와 러시아 마하주의자들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외부의 사물은 우리의 감각의 총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각은 이러한 외부의 존재의 이미지에 다름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는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마하주의자의 관념론을 논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유물론이 “건전한 보통 사람”의 “소박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물론 푸앙카레, 오스트발트, 랑제빈, 제이.제이. 톰슨, 리기, 헤르츠, 볼츠만, 로지와 같은 당시 과학자들의 저서와 논문을 찾아 읽었고, 당시 물리학의 발전이 물질이 소멸했다는 관념론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지한다고 설파했다.
레닌의 저서는 러시아에서 널리 읽혔고 러시아 혁명 이후 오랫동안 소련 사회를 지배했다. 마하가 자신을 비판했던 레닌의 저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사족: 마하는 지금 우리에게 음속의 배수인 ‘마하수’(數)의 개념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마하수는 그의 1887년 초음속에 대한 연구에서 연원했는데, 이 연구는 마하가 자신의 모든 연구 중에 가장 덜 중요한 부류로 간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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