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5.26 19:56 수정 : 2005.05.26 19:56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맹자

실수 없도록 마음을 삼간다는 뜻으로 ‘조심’이란 말이 있다. 한자로 ‘操心’이라고 적는다. 중국어의 ‘소심(小心)’, 일본어의 ‘용심(用心)’에 해당한다. ‘소심’은 <시경>에 ‘소심익익(小心翼翼: 대단히 삼감)’이란 어구가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래전부터 쓰인 말이다. ‘용심’은 <논어> <맹자> <장자> 뿐만 아니라 <화엄경>에도 나올 정도로 흔한 말이다. 이에 비해 ‘조심’은 뉘앙스가 비장하고 또 의미가 철학적이다. 본래 <맹자>의 ‘진심·상’ 편에서 나왔다. 즉, 갖가지 곤경에 처한 사람은 “마음 쓰기를 위태로운 듯이 하고 환난에 대해 염려하기를 깊이 하므로 사리에 통달하게 된다(其操心也危, 其慮患也深, 故達)”는 구절에 나온다.

그러데 ‘조심’에서 붙잡을 조(操)자를 사용한 것은 ‘고자·상’ 편(제8장)과도 관련이 있다. 맹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의(仁義)의 마음인 양심이 있지만 도끼로 산의 나무를 베어내듯이 하면 양심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양심을 잃어버렸다 해도 잘 양성하면 회복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이 때 공자의 말(또는 고어)을 인용해서 “(양심 또는 마음이란) 잡으면 보존할 수가 있고 놓으면 없어진다(操則存, 舍則亡)”고 했다. 조심이란 말은 심성수양의 뜻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 말이 우리의 일상어로 된 것은 <맹자>가 우리에게 각별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공자의 인(仁) 사상을 구체화해서 유학 사상을 발전시킨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살육이 자행되던 시대에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자’라야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왕도정치의 이념을 역설한 정치가였다. 그가 실의한 뒤 만년에 집필하였다는 <맹자>는 유가 경전으로서 사서삼경, 사서오경, 십삼경 등의 분류에 꼭 들어간다. 게다가 그 문체는 한문문장의 모범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맹자>가 그 지위를 인정받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맹자>가 경(經)으로 존중받게 된 것은 남송의 주자(주희)가 그것을 사서의 하나로 인정한 뒤부터인 듯하다. 아마 “군주가 신하를 하찮게 여기면 신하도 군주 보기를 원수같이 여기게 된다”는 말에 담긴 군신관계의 상대론 때문일 것이다. 또는 맹자가 ‘혁명’의 설을 과격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천명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민중에게 있다
따라서 민의에 어긋나면
군주를 토벌할 수 있다.
그것이 혁명이다


혁명이란 본디 <역경>에 나오는 말로, 천명(天命)이 개혁된다는 의미였다. 한 군주에게 있던 천명이 다른 군주에게로 옮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맹자는 천명의 소재를 민중에게서 찾고, 민심의 향배에 따라 천명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민의에 반하는 군주를 방벌(放伐: 추방하거나 토벌함)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은나라 정벌과 주나라 정벌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을 받자, 맹자는 신하가 군주를 죽인 일이 없고 ‘한 사람의 필부’를 죽였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민심이 떠난 군주를, <상서>의 논리를 이어 ‘외로운 사나이(獨夫)’로 간주하였던 그 답변은 매우 신선하고 그만큼 급진적이었다. 이러한 혁명론(방벌론)을 위정자가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과연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혁명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맹자>의 혁명론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래서 <맹자>를 금서로 삼았다가, 뒷날 관련 부분을 삭제한 채 간행하도록 하였다. 일본에서도 에도(江戶)의 어떤 관백은 <맹자>를 금서로 삼았다고 한다.

맹자는 전국시대의 지적 풍토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론술과 비유법을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그 언설이 임기에 능하였으므로 혹자는 맹자를 두고 변재(辯才)가 뛰어나다고 비판하였다. 북송 때 정이는, 안연은 아성(성인에 버금가는 존재)이지만 맹자는 한 등급 아래의 대현(大賢)이라고 평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맹자>는 유가 경전 가운데서 격이 낮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기존의 사유체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철학을 구축하려고 할 때 <맹자>의 심성론에 주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강화학파 학자들이 특히 그 심성론에 큰 가치를 두었다.

사실 <맹자>는 쉬운 책이 아니다. 주자도 이 책은 읽기가 어렵다고 고백하였다. 맹자가 성(性)을 기질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고 본원을 곧장 탐색한 점, 정(情)을 말하면서 측은·수오·사양·시비를 인의예지의 단(端)이라고 논한 점, 수양의 방법으로 구방심(求放心: 풀어진 마음을 찾아서 회복시킴)을 강조한 설은 특히 그렇다. 더구나 맹자의 사상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였다, 처음에는 인의설에서 출발해서 다음에는 왕도론을 말하고 다시 성선설을 역설했으며, 마지막에는 정신주의로 나아갔다(하치야 구니오, <중국사상이란 무엇인가>). 맹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 점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맹자>는 춘추대의와 중화중심주의의 논리를 담고 있다. 우리로서는 정말 ‘제대로 읽어야 할(善讀)’ 책이다.

하지만 맹자는 인류의 역사와 지성의 발전에 매우 선명한 이념을 제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본주의(또는 중민주의)를 주장하였고, 인간학적으로는 양심(인의의 마음)의 회복을 제창하였다. 한나라 때 역사가 사마천은 맹자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라 하고 인의의 왕도정치를 역설한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는 그 높은 이상에 감동하여 한숨을 쉬었다고 하였다.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맹자의 이 정치론은 전제왕권의 유지나 강화에 기여했을 뿐이라고 재단할 수 있을지 모른다(유택화, <중국 고대 정치사상>). 하지만 맹자가 “백성(민중)이 고귀하고 사직(국가)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라고 언명한 것을 보라. 그 선언은 전근대 시기 내내 정치의 정당성을 되묻는 담론의 기제이어 왔다. 또, 인간의 양심을 믿은 맹자의 심성론은 어떤가. 그것에 대해, 전제군주가 민중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방안을 제출한 것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맹자는 특히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지식인들에게 “뜻을 높이 가지라(尙志)”고 하였다. “해와 달은 본래 밝다. 자그마한 구멍이라도 내어 빛을 받아들이면, 거기에 그 빛은 반드시 내리쪼인다(日月有明, 容光必照焉)”고도 하였다. 인간 일반에게 자기반성과 자기향상을 강조한 그 계몽성을 결코 폄하할 수가 없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맹자>가 지닌 두 측면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심성 수련을 바탕으로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군사(君師: 군주이면서 유학의 사표)이고자 하였던 정조는 <맹자>를 거듭 읽고 꼼꼼하게 메모를 하고, 특별 선발의 문신들에게 조목조목 질문을 던졌다. 동아시아의 군주 가운데 <맹자>의 심성론을 정치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군주는 정조가 유일한 듯하다.

‘조심’이란 말이 우리 일상어로 정착이 되었던 것은 <맹자>가 그렇게 군주에서부터 사대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정신적 완성을 긍정하였으며 민중의 실제 삶을 중시하는 정치이념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 고전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서평자 추천 도서

신완역 한글판 맹자

맹자 지음, 차주환 옮김

명문당 펴냄, 1만5000원

(주자의 주와 한대의 주, 근현대의 연구성과를 종합)

맹자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 1만3000원

(읽기 쉬운 현대어 풀이)

맹자강설

이기동 옮김

성균관대출판부 펴냄, 2만8000원

(읽기 쉬운 현대어 풀이)


50자 서평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