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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6 21:01 수정 : 2005.05.26 21:01

송승환/PMC 프러덕션 대표이사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전혜린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처음 읽은 것은 벌써 20년도 전의 일이다. 책의 첫 페이지를 열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전혜린이라는 한 지독히도 외롭고 치열하게, 짧지만 온전한 ‘생’을 살고 간 여자에게 줄곧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다. 유복한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 속에서, 3-4살 때 이미 한글과 일어로 된 책을 읽었다는 전혜린. 이국적 도시 신의주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에게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알 수 없는 동경을 심어줬고, 회색 빛 우울의 도시 뮌헨은 그의 고독과 번뇌, 추억 그리고 사랑을 알게 해 준 제3의 공간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처음으로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에세이 속에서 섬세하고 조금은 우울하게 묘사된 독일 뮌헨의 풍경은 유럽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 그리고 어떤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몇 해 전 11월에 나는 난타 공연차 뮌헨을 방문했었다. 뮌헨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전혜린, 그녀가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 그리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외로움과 치열하게 싸우며 배우고 살아냈던 뮌헨의 풍경이었다. 회색 빛 건물들과 오랜 역사의 숨결이 묻어나는 건축물들과 거리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기에 그리도 철저히 혼자였고, 그리도 치열하게 자유로운 정신을 위해 투쟁했던가. 호기심, 궁금증 그 이상의 설레임이 나를 재촉했다.

공연차 방문한 잿빛 도시 뮌헨에서 가시지 않는 쓸쓸함
그 뒷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라난 곳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뮌헨의 11월은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적막하다. 마치 오래된 비밀을 간직한 채 느리게 돌아가는 거대한 성 같은 도시. 뮌헨에 도착한 나는 우선 슈바빙으로 향했다. “완벽하게 자유로운 인간처럼 현대 속에 살아 숨쉬는 땅이 슈바빙이다.” 그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표현했던 슈바빙. 그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점심식사 대신 즐겨 마셨다던 뜨겁게 끓인 와인. 평소 술을 그다지 즐겨 마시지 않는 나이지만 왠지 그루바인이라는 뜨거운 와인은 꼭 한 번 마셔보고 싶었다. 전혜린이 4년이나 살았다는 슈바빙은 시인, 화가, 작가, 음악가 등의 예술가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나무가 즐비한 슈바빙의 어느 길가 까페에서 나는 뜨거운 와인을 주문했다. 검붉은 와인이 두터운 찻잔에 데워져 나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후끈하고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두터운 찻잔 탓인지, 아니면 차갑게 가라앉은 11월 뮌헨의 찬바람 탓인지 뜨거운 와인으로는 다 덥혀지지 않는 어떤 한기가 와인 잔을 잡은 내 손끝에 내내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비빔밥과 된장국으로 뮌헨의 찬바람에 지친 속을 달래다 나는 문득, 그 가시지 않는 쓸쓸함 같은 한기의 정체를 보았다. 그것은 향수(鄕愁). 내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본능과도 같은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도 어쩌면 그래서 이국 땅에서의 4년이란 시간 동안 그렇게 철저히 홀로 된 외로움과 싸우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전혜린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지금도 가끔 내 삶이 나태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꺼내어 보곤 하는 책이다. 내 인생의 지침서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그 치열한 삶의 기록은 내 안에 숨어 있던, 그리고 잠시 일상에 묻혀버렸던 삶에의, 사람에의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아직까지는 별 반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이제 시작되는 뜨거움과 빛나는 계절, 여름의 문턱에 발 하나를 걸친 채 나는 또 다시 스산한 늦가을의 냄새가 밴 이 책을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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