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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6 21:07 수정 : 2005.05.26 21:07

공선옥/소설가

춘천에서 전주로 이사를 왔다. 사람들은 묻는다. 전주로 이사가니까 좋지요? 정말 좋은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답은 잘 모르겠다,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집 안에만 있으면 여기가 춘천인지, 전주인지 잘 분간이 안 간다. 춘천에서 그랬던 것처럼 살다보면 그 지역만의 정서, 그 지역만의 독특한 색깔 같은 것에 조금씩 눈을 떠가게 되겠지만, 아직은 정말 잘 모르겠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옮겨 앉았기 때문이다. 전주로 이사를 하기로 하고 이사할 집을 물색하면서 내가 가장 신경쓴 것은 그 집이 조용한가, 아닌가였다. 춘천 집은 아파트 진입로 바로 옆에 있어서 좀 시끄러웠다. 물론 서울 집들보다야 낫겠지만, 진입로를 오가는 찻소리 때문에 더운 여름에도 뒷베란다 문을 잘 열어두지 못했다. 나는 그저 집이 조용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것만 같았다. 원체 높은 층은 싫고 해서 2층을 골랐다. 단지 한가운데 있어서 조용하고 2층이라 바깥의 수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나타났다. 밤인데도 이상하게 집 안이 환했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환한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보름달이 떴나,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 공중에 두둥실 떠올라 있는 노란 가로등불. 가로등불은 바로 내가 사는 2층집과 똑같은 높이에 떠서 드넓은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통해 고스란히 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니. 그것도 한쪽 베란다가 아닌 앞뒷쪽 베란다에서 동시에!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집이 너무나 쉽게 구해진다, 싶었지. 늘 무슨 일을 해놓고 나서 어쩐지 불안했고, 그 불안의 정체가 무언지 몰라 또 불안했던 나날을 살았다. 바로 그 어쩐지 불안한 상황이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내가 이 집을 구해 놓고도 어쩐지 불안했던 그 이유를 가로등불을 보고서야 알게 된 것인데, 허나 어쩌랴. 일은 이미 수정불가능의 단계로 접어든 지 한참 지난 뒤인데.

관리사무소에다 불편을 호소하면서 어떻게 좀 해 달라 했더니, 그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환하니까 좋잖아요? 폭폭한 한숨이 절로 나오며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진다. 그래요, 환하니까 징하게 좋구만요!

가로등불로 대변되는 근대의 괴물 그 풍요를 사들이면서
행복해하는 게 어이없다
그런 줄 알면서 아무렇지 않은척
어쩌면 내 상처는 그것인지도…

전주로 이사 오기 전, 전주의 선배문인에게 어느 동네가 좋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바로 지금 내가 이사온 이 동네만큼은 피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지금 겪는 이 ‘불행’은 어른 말씀을 안 들은 죄인가, 싶어 왈칵 눈물까지 솟으려고 한다. 심란한 마음도 달랠 겸, 전주로 이사와서 누릴 수 있는 호강이라고 내심 정해 두었던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전라선 기차를 타는 일이다. 태백선과 전라선은 이 나라의 기찻길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기찻길들이다. 생활이 나를 지치게 할 때(일상의 소소한 트러블들은 사실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춘천 살 때는 태백선을 타곤 했다. 일단 원주로 버스를 타고 가서 태백까지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그 깊고 높은 산들을 헉헉거리고 오르다 보면 나를 지치게 하는 일상을 향해서도 부드러운 연민의 마음이 들곤 하였다. 그리고 이제 전주에서는 전라선을 타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전라선을 타고 내 고향 곡성역에 내렸다. 곡성 산골에서 전기도 없이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녹색평론사에서 펴낸 <9월이여 오라>를 번역한 박혜영 교수의 역자후기에 나는 너무나 깊히 공감하던 바였다. …처마 밑에 비 긋는 소리도, 여름밤 빛나던 먼 별빛도 사라졌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근대화, 개발, 경제성장의 과정에서(공선옥 생각에 세계화의 과정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것은 예외없이 ‘작고 연약한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곡성 산골에서 전기도 없이 사는 지인은 갈수록 우리 삶이 피폐해지고 살벌해지고 돈을 더 많이 벌어야만 하는 구조로 변해가는 것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자니, 그의 삶이 오직 고달픈 것이랴, 지레 짐작하며 그래도 불빛에 ‘상처’당한 몸과 마음을 불빛 한점 없는 곳에 가서 위로받고 와야지, 하면서 갔다. 아,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내 상처의 근본은 어쩌면 단순한, 눈에 드러나는 ‘가로등불’이 아니라는 생각. 밤에도 환한 가로등불로 대변되는 ‘근대’라는 괴물, 돈을 점점 더 많이 벌어야만 생활이 가능한 구조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청난 돈(내 처지에서는)을 주고 사서 기어들어간 곳이 겨우 시멘트 덩어리 구조물이라니. 뼈빠지게 돈 벌어서 한다는 짓거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대기업의 ‘전기제품’들 사들이는 일이라니. 그런 짓거리 하면서 행복해하는 것이 나는 어이없고 그리고 서글픈 것이다. 서글픔이 바로 내 상처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는 것, 내 상처, 내 슬픔의 요체는 어쩌면 그것인지도 모른다.

‘전기없는 집’에 가서 나는 행복했지만, 그러나, 또다시 긴 불행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 ‘전기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어쩌면 나의 상처요, 슬픔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텔레비전이 없고 냉장고가 없고 컴퓨터가 없고 휴대폰이 없는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가로등불 대신 별빛으로 환한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연구와 생산’은 계속되고 있다. 경제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지금 묻고 싶다. 슬프지 않은가? 그리고 본다. 최신 휴대폰을 들고 환하게 웃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을. 나는 슬프고 소년소녀들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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