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6.02 09:17 수정 : 2005.06.02 09:17

병인년을 보내고 새해 정묘년이 시작된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27년 1월 10일자로 이 땅 식민조 조선에는 종래 볼 수 없던 새로운 성격의 잡지가 창간호를 낸다.

표지에 박힌 제목은 '長恨'(장한). 길게 탄식하고 한탄한다는 뜻인데 아마도 당(唐) 시기를 대표하는 중국 시단의 거인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장편 걸작 '장한가'에서 따 왔을 것이다.

제목과 함께 창간호 표지에는 이런 선전문구가 실렸다.

"동무여 생각하라, 조롱속에 이 몸을." 잡지 창립 발간사에 해당하는 권두언에는 "웃고 살아도 부족이 많은 세상을 어찌하여 한탄으로 살까보냐. 그러나 우리의 이 '장한'은 앞으로 장한이 없게 하자는장한이다"는 문구가 보인다.

이로 본다면 대단한 역설로 잡지 타이틀을 선택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장한가를 불러야 했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권두언 다음 구절이그들을 폭로한다.

"기생도 사람이어니 영원히 눈물과 한숨만 벗을 삼을 것이냐! 그것을 원치 않거든 마음과 힘을 합치자."

여러 장을 넘기면 영춘사(迎春辭. 봄을 맞이하는 글)이 나온다. 그 첫 대목은당장 세상에 대한 울분과 분노로 쏟아진다.

"철판에 붉은 피 흐르고 가슴에 심장이 살아 뛰는 사람으로서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짐승으로 더불어 변하게 되는 때에 어찌 탄식인들 없으며 눈물인들 없으리오마는 탄식과 눈물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못하니라." 그래서 이런 억압과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이 땅 조선의 기생들은 당당히 자기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일은 발생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설혹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아마도 그 운동 주도자들은 능지처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왕과 후(侯)와 장군과재상에 어찌 별다른 씨가 있을쏘냐?"(王侯將相 寧有種乎)라고 외치며 일어난 고려무신정권의 일대 패자 최충헌의 가노 만적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힘이다. 이것은 또 근대의 억압이기도 하다.

기생이기는 전근대나 근대인 식민지시대와 다를 바 없었고, 또 그들을 향한 사회의 멸시와 억압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었으나, 근대는 그런 그들에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해방'의 출구를 마련해 주면서도 한편에서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성 억압의 구조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래서 근대는 해방이면서 억압이다.

조선의 기생사회에 근대가 일으킨 요동 중 하나가 조합의 탄생. 조선의 기생조합은 권번이라는 이름으로 한일병합을 즈음해 동시다발로 생겨났다.

이에 더해 '기생 스타'도 탄생했다.

장연홍. 1911년 평양 출생인 그는 14살에 평양기생 권번이 되어 뛰어난 미모와지조를 이름을 날리다가 21세에 중국 상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앳돼 보이는 너무나 고운 얼굴. 이 사진에 나타난 장연홍은 단정한 단발머리다.

1930년대 조선에 유행한 말 중하나가 '단발미인'. 파마도 유행했다.

이런 새로운 시대 흐름을 주도한 계층이 바로기생들이었다.

1915년 일본의 조선 시정(식민지배) 5주년을 기념한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됐다.

일본 내국인들을 위한 광고포스터에는 경복궁과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하는 기생 사진이 실려 대대적으로 배포됐다.

1923년 10월에 열린 또 다른 조선물산 공진회. 그 입장권을 구입하는 이에게는잡화점 할인 구매권과 함께 거기에는 주최측에서 미리 변장을 시켜 놓고 경성시내에돌아다니는 기생 5명을 발견하면 20원짜리 상품권을 준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기생이 상품화해서 잡화점 할인권 취급을 받는 장면이다.

기생을 이렇게 몰아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서구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였다.

한국고전 문학전공인 신현규(40)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가 기생 관련 자료 수집전문가로 이름 높은 이종호 씨에게 관련 자료를 제공받고 그 자신이 수집한 기록을근거로 최근 완성한 단행본 '꽃을 잡고'(덕형)는 부제처럼 '파란만장한 일제 강점기기생 인물과 그들의 생활사'를 겨냥하고 있다.

책 전편을 통해 신 교수는 기생을 "전통문화예술을 발전시킨 주역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고, 기생 개개인의 일생을 발굴해 복원하려한 노력은 분명 대단한 시도이지만, "기생이 매음하는 창기로 자리잡게 한 것은 일제의 치밀히 계산된 문화침략 중 하나"라는 시각이나 관점은 교정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런 논리는 자칫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기생들은 창기가 아니었는데 일제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결론을 만들기 쉽다. 하지만 이는 역사의 은폐일 수 있다.

기생에 대한 억압성은 일제시대에 비해 전근대 조선사회가 훨씬 혹독했다. 더구나 이런 구조에서 기생들 자신에게는 그런 억압성의 교정을 사회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창구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가 바라는 바가 전근대 조선사회를 적어도 기생들에게는 지상낙원이었던 것처럼 그리는 데는 있지 않을 것이다. 299쪽. 1만7천원. (서울/연합뉴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