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2 15:37
수정 : 2005.06.0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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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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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지배한 친일 콤플렉스는 친일 국민교육의 학습효과가 사회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외면하고 일본식 국가주의의 검은 안경을 낀 교육자들이었으며, 스스로 국가주의에 사로잡힌 시대의 포로였던 것이다.”
<전쟁과 학교>의 저자 이치석이 말하는 ‘그들’의 대표자 중 한사람인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그러면 ‘의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하는 나의 말에 대하여 제군은 당연히 어떤 의무인가를 명시하라고 할 것이다. …대담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한 제군 및 우리 반도 동포가 갖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6일 ‘대의에 죽을 때-황민됨의 의무 크다’는 제목으로 <매일신문>에 쓴 글이다. 또 한 사람 이화여전의 김활란은 같은 신문 12월25일치에 ‘남자에게 지지 않게-황국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아시아 십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학교가 앞으로 (전선 파견을 위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태는 이미 새삼스러울 게 없을 만큼 알려져 있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 1937년 중일전쟁 때부터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의 기간,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그때부터 한국 현대사의 실질적인 분열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김성수 김활란이 활약했던 그 절망적 시기야말로 나중에 북한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는 ‘혁명적 민족주의자’들과 남한 사회를 장악하게 되는 ‘친일파’들이 집단적으로 출생하고 자란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엔 황국신민을 강요하고
분단의 시대엔 참혹한 대결의 장으로
‘우리’다운 우리 부정한 100년 학교역사 ‘반성문’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한민족 집단자아 분열의 연원은 그보다도 더 깊고 오래됐으며, 그 주범은 김성수 김활란들이 주역을 맡았던 학교교육이다. “국가주의를 목적으로 한 국민교육은 지난 100년간 우리 학교사에서 기형적으로 일관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국민교육이었고, 분단시대에도 국민교육이었다. 그 시대마다 국민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인 우리민족의 집단자아를 타자화시키고 분열시켰다. 한때 우리는 황국신민이 돼야 했고, 한때는 같은 민족을 ‘빨갱이’로 불러야 했다. 그것은 우리 국민교육이 적어도 우리다운 ‘우리’를 부정했던 과거사의 한 페이지가 분명하다. 최근 남의 나라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도 학교교육이 ‘우리’를 배반했던 순간부터 초래된 일인지 모른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해체된 기독교 왕국을 대신하면서 혁명 주체인 민중의 탈문맹화와 새로운 역사인식을 통한 국민의 양성, 그를 통한 국민국가 방어를 위해 국민교육이 시작됐다. 혁명의 좌절과 함께 배척대상이었던 수도원·교회 전통이 다시 국민교육에 스며들고 이상은 변질됐으며 연이은 참혹한 전쟁의 도구로 동원됐으나 학교체제는 19세기 이래 서구에서 보편화되면서 민족적·국민적 감성의 통합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 땅의 교육은 그마저 온전히 담지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이어지는 민족 집단자아 분열에 기여했다. 제1단계인 구한말의 외부 기독교계가 설립한 미션스쿨, 청일전쟁 직후 고종이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고 새로운 국민교육의 막을 올린 2단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한 이후 일제 식민지배 시기의 3단계, 그리고 1945년 8월 이후 지금까지의 4단계로 정리되는 우리 근대교육은 가해자인 서구 및 일본 제국주의의 국민교육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대한제국은 온전한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했으며, 일제는 국민을 아예 말살하려 했고, 해방 이후 분단시대는 동족끼리 서로를 부정하는, ‘인민’과 ‘국민’이 대결하는 분열의 극대화가 진행됐으며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교육은 그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왜곡을 유지·확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가해자였다.
학생들을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노역, 전장에 동원하는 등 철저히 식민지지배에 굴복하고 아부함으로써 민족을 해체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점령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자 마자 그 굴복과 아부 대상을 바꿔 하루아침에 미국을 ‘귀축’에서 ‘은혜로운 천사’로 둔갑시켰고, 일본어대신 영어를 준모국어로 섬겼으며, 남북 모두 상대를 ‘괴뢰’와 ‘빨갱이’로 몰며 난도질했다. 이 자아분열의 최일선에 학교교육이 있었다. 아직도 일본 우익을 능가하는 일제 식민지배 예찬과 자국민 엽전론을 펴고, 사고와 판단의 근거를 자기 땅이 아니라 미국 땅에서 찾는 심각한 지적 사대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식민지적 풍토, 이른바 ‘한승조 현상’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일제가 전쟁동원을 위해 날조한 ‘국민학교’라는 말을 폐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던 저자는 저항하기 어려운 외부의 힘이 작용한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아직도 그 과거를 묻지 않고 학교교육을 여전히 국민교육이라 부르면서” “민족분열을 가중시킨 역사의 주범”이었음을 인정하고 환부 치유에 나서지 못하는 우리 학교의 역사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 그냥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부터 반성하고,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에게 속죄하며 용서를 빈다. 그러면서 아예 이 책을 “반성문”이라고 부른다.
“조그만 에세이”라고 했지만, 유럽 현지 조사·연구를 통해 그곳 국민교육, 공교육의 역사를 살피고 우리 교육 사정을 돌아보는데도 다양한 자료들을 동원한 내공이 만만찮아 보인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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