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2 15:43
수정 : 2005.06.02 15:43
바다출판사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
철학책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게 되고, 과학책은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 읽게 마련이다. 철학이나 과학에 관심 없으면, 역사나 문학에 관심 없으면 그 관련 책을 안 읽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독서를 의무가 아닌 ‘취미’ 범주에 넣는 이유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를 만들어가면서 사뭇 상기되어 있었고, 책을 세상에 내보내고 난 뒤에는 한껏 삐져 있었던 것 같다.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그 당시 나는 이 책을 취미 독서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읽어야 할 책으로 부르짖으며 만들고 있었다. 노년층을 위한 책이니만큼 노인들은 주인공인 셈이니 당연히 읽어야 하고, 자식 세대는 제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읽어야 하며, 파릇파릇한 청춘들 또한 언젠가 늙어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판매현황을 살펴보며 안타까워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슬슬 삐져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삐짐의 대상은 누군지 알지도 못할 불특정 독자들이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안 읽는가?’
‘고광애의 실버상담실’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실제 67살의 저자가 90살 난 노모, 74살의 남편과 지지고 볶으며 쌓아온 경험에 의거해, 노인들의 심리와 문제점 등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고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어머니 흉’이나 ‘말 안 통하는 울엄마’와 같이 파편화된 에피소드 식으로만 오갔던 노인네 이야기가, 이 저자의 정리식 수다를 통해 노년 문제를 공통화된 노인의 특성에 의거해 풀어갔다. 출가한 자식을 정신적으로 독립시키지 못해 아예 아파트 옆동에 집을 마련해주는 노인, 버스에서 피곤함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젊은이를 깨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하는 노인 등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보아오는 노년의 자화상들을 밝히고 있지만, 그러나 그 풍경만 읊고 있지는 않다. 대한민국 노년의 이분법적 사고, 즉 늙어가면서 갖게 되는 ‘차별대우’의 서러움과 늙어가면서 생기는 ‘특권의식’의 당당함. 이 두 사고의 충돌에서 자유로운 노인은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나는 원고를 몇 차례 다듬어가면서, 이 책의 독자는 노인보다는 오히려 내 부모에 대해 가끔씩 ‘대체 왜 저러셔?’라며 짜증 반, 염려 반 했을 자식 세대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 세대, 노년 세대에 대한 문제점 이면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적잖은 이해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러움에 눈물짓고, 지나친 당당함에 실수를 저지르는 이 땅의 실버들에게 저자가 외치는 위로와 충고다. 그 위로와 충고가 건방지지 않은 건, 당연히 같이 늙어가는 동세대 늙은이의 눈높이 수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 <바람난 가족>을 연출한 임상수 감독의 어머니기도 한 저자 고광애씨. 이미 한 공중파 라디오 노인대상 프로그램에서 3년째 상담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원고를 받은 이후에 안 일이다. 한 백화점 2층 커피숍에서 편집자인 나를 처음 만나 그는 이렇게 한 마디 던졌다. “괴로워하지 말고, 원고를 영 못 읽겠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요. 나 하나두 안 섭섭해. 버려지는 것에 초연하는 것도 노인네의 미덕이야.” 그러나 그녀의 원고는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약간 흩어져 있는 내용만 구성을 다시 짜면 충분하겠다는 내 말에 그녀의 대답. “늙은이라서 봐주는 거 아니우?” 강희재/바다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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