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2 16:18
수정 : 2005.06.0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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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이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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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일본인들이여. 이것이 전쟁이다.”
1999년 겉표지에 이 문구가 또박또박 새겨진 장편소설 <망국의 이지스>를 내놓으며 일본 대중문학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후쿠이 하루토시(37). 해상 자위대와 북한 테러리스트가 등장하고, 넘길 때마다 각종 무기와 군대용어가 튀어나오는 무거운 내용의 원고지 3600매짜리 소설이 60만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2005년, 이제 그는 출판계를 넘어 대중문화계의 총아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 3편이 한꺼번에 올해 영화화되었다. 이미 올 봄 히트한 <로렐라이>(소설제목 <종전의 로렐라이>)를 비롯해 6월 <전국 자위대 1549>, 7월 <망국의 이지스>가 차례차례 개봉한다. 3편 모두 일본 영화계에선 드물게 100억원 이상 제작비가 투여된 대작 액션영화이며 각각 육, 해, 공 자위대가 전면 협력한 작품들이다.
영상작품의 소설화나 파생기획이 활발한 일본 출판계에서 후쿠이는 최고의 ‘상품’이다. 영화공개에 앞서 지난 20일엔 소설 <전국 자위대 1549>가 발간되었다. 이달 초부터는 <망국의…>를 소녀만화화한 <씨 블로섬 케이스 729>의 원작을 맡아 연재 중이다. 남자냄새 물씬 풍기는 그의 작품이 소녀만화에까지 진출한 건, 그만큼 정서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얘기다. <망국의…>의 등장인물 한명에 대해 파헤친 <또 하나의 망국의 이지스-올 어바웃 키사라기 고>(후소사)에선 감수를 맡았다. 5년 전 후쿠이가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 를 원작으로 썼던 판타지 소설 <달에는 고치, 땅에는 과실>(겐토샤)도 후쿠이의 인기에 힘입어 최근 단행본으로 재출간됐다. 언론들이 올해를 ‘후쿠이의 해’라 부르는 게 과장이 아닌 셈이다.
최신작 <전국 자위대 1549>는 오락적 성격이 강한 액션소설. 육상 자위대가 인공 자기발생기 실험을 벌이던 중 사고가 일어나, 실험중대가 460년 전 전국시대로 빠져들고 만다. 현재의 일본까지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중대 출신으로 지금은 술집주인인 가시마 등이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한다. 가시마가 도착한 전국시대엔 옛 대장 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키운 일본 역사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되어 있다. 현실에서 먼저 공격하지 못한다는 자위대의 규정에 충실해 부하를 잃었던 쓰요시는, 전국시대에선 자위대의 규정을 내던지고 전쟁에 나선 것. 역시 자위대의 규정에 따라 먼저 공격을 못하는 가시마는 차례로 부하들을 잃고 만다.
<망국의…>는 후쿠이 작품의 전형이다. 일본 해상 자위대의 최신예 이지스함 이소가제가 어느날 부함장과 어느 국가(북한!)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점거된다. 이들은 도쿄만에 이지스함을 대고 최신예 무기가 1200만 도쿄시민들을 겨누고 있다고 협박한다. 평생을 헌신해온 국가의 음모로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고 믿는 부함장, 조국에 절망하며 전쟁의 잔혹함을 모르는 일본인들을 일갈하는 북한의 테러리스트, 무력한 국가를 대신해 단신으로 이지스함에 오른 자위대원이 남은 12시간을 놓고 대결한다는 내용. 영화제작시 자위대 내부 반란이라는 설정임에도 “처음으로 자위대원을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방위청이 전면협조에 나섰다고 한다.
상과대 중퇴에 문학수업은 전혀 받은 적 없던 후쿠이는 작은 경비회사에 다니던 중 작가로 데뷔했다. “24시간씩 빌딩 경비를 서는 일이었는데 시간이 하도 남아돌던” 탓에 영화 시나리오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내용을 끄적거려 동료들에게 들려줬던 게 계기였다. 동료들의 격려에 힘입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98년 <트웰브 Y.O>로 일본 추리문학계의 최고상인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뒤 전업작가로 나섰다. 지난해 발표한 첫 단편집 <6 스테인>은 나오키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언제나 자위대, 정보국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후쿠이의 작품엔 ‘전수방위’이라는 일본의 뜨거운 이슈가 주요 테마다. 여기에 무력한 국가, 고독한 영웅, 남자들의 우정과 눈물이 공식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후쿠이를 단순히 우익 작가로 규정하긴 어렵다. 일본의 무책임한 집권층과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우리가 지켜야 할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 우익의 전유물일 순 없기 때문이다. 후쿠이 스스로도 “내 작품의 테마는 전수방위”라고 못박고 있다. 문제는 방위청이 “방위문제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여성과 젊은층에 대한 홍보를 위해” 전면 협력하거나 <산케이신문>이 대대적인 특집으로 연재하고 있는 예에서 보듯, 그의 작품이 지금의 일본사회에선 개헌을 주장하는 우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쿠이의 인기는 갈수록 평화주의 세력이 힘을 잃어가는 일본사회의 위태로운 모습의 상징이기도 하다. 도쿄/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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