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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2 16:50 수정 : 2005.06.02 16:50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을 계기로 중국에서 반일감정이 거세게 분출했던 지난 4월 베이징 시민들이 일본을 성토하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4월17일 중국 광둥성의 개방도시 선전에서는 3주째 주말 반일시위가 벌어졌다. 중국식 시위는 출근하듯 아침 9시 정각에 시작한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9시 정각에 집결지인 선전체육관에 모여든 군중들은 시내를 휩쓸고 다니다 저녁 무렵 일본 백화점이 있는 선난대로로 몰려들었다. 시위 군중은 좀처럼 흩어질 줄을 몰랐다. 이 때 선전시의 1인자인 리훙중 선전시 당위 서기가 군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의 등 뒤에는 각 잡힌 몸매를 자랑하는 건장한 경호원 10여명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시위 군중의 눈이 리 서기에 집중됐을 때, 리 서기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학우 여러분!”이었다. 이 광경을 본 이들은 한결같이 1989년 5월의 그 뜨겁던 천안문 광장을 떠올렸다. 손마이크를 든 자오쯔양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시위중이던 대학생들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첫 마디를 그렇게 떼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장면부터 선전의 군중시위 장면은 1989년의 비극과 달리 희극 버전으로 전개됐다. 선전의 시위 군중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린 학생이 아닌데요!”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공·상업·금융도시인 선전시 반일시위의 주력부대는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을 리 서기는 아직 보고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머쓱해진 리 서기는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목청을 돋우었다. “여러분들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군중은 리 서기를 봐주지 않았다. “쓰레기 줍는데요?” 군중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리 서기는 일본 기업 앞에 중국 국기를 꽂으려는 시위 군중에게 “국기는 태양이 뜰 때 게양해서 해가 질 때 거둬야 국가와 국기에 대한 존엄을 지킬 수 있다”고 훈시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즉각 반박했다. “그럼 1997년 홍콩 반환 때는 왜 한밤중인 0시를 기해 오성홍기를 게양했죠?” 리 서기는 사태가 꼬여가는 걸 느꼈지만 “그건 다른 얘기”라고 얼버무리며 슬쩍 화제를 바꿨다. “여러분들 모두 배고프실 겁니다. 어떤 분들은 오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시위를 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을 겁니다.” 이런 자상한 배려는 다시 단식 학생들의 건강을 염려하던 1989년의 자오 총서기를 연상시켰다. 군중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우린 일 없어요, 상관없어요!”

군중의 자발적 시위 참여

사태를 책임지는 자세로 시위 군중을 설득해 해산시키려던 리 서기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변했다. 리 서기가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뜨자마자 선전시 공안국장은 강제 해산 명령을 내렸고, 무장한 전투경찰들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현장에 끝까지 남아 있던 1000여명의 시위대를 연행해 버스에 실었다. 시위 군중들은 강제로 차에 실리면서 “애국 무죄! 인민 만세!”를 외쳤다. 과연 역사는 되풀이되는 모양이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러나 다음번엔 희극이나 풍자극으로.

홍콩 <아주시보>가 4월18일 상세히 전말을 보도한 선전시의 반일시위 양상을 보면 적어도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지난 4월 3주 동안 주말마다 터져나온 반일시위가 단순히 중국 정부의 배후조종을 받은 ‘관제시위’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 당국이 한쪽 눈을 감아준 덕분에 반일시위가 터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반일시위가 폭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건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의 유력한 시사주간지인 <아주주간>(5월1일 발행)은 반일시위가 폭발적으로 전개된 건 중국 사회에 숨어 있는 7가지 억압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주주간>에 따르면 중국 사회에는 △민족주의 △언론 △사회 하층 △학원 △지식분자 △인터넷 △헌법 등 7가지 범주에 대한 억압이 존재한다. 중국 당국은 이 7가지 범주를 자유롭게 풀어놓을 경우 중국 사회를 크게 뒤흔들 수 있다고 보아 강력하게 억눌러왔다. 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게 마련인 농민·노동자 등 하층민과 학생, 지식인 등은 당연히 주요한 통제 대상이다. 사회에 대한 ‘불온한 시각’이 퍼져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언론과 인터넷은 철저하게 봉쇄돼왔다. 민족주의도 지나치게 팽배해질 경우 사회 불안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적절히 억눌러야 한다. ‘헌법’의 경우는 중국공산당이 비록 ‘법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당’이 법보다 우선시돼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헌법’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시각 또한 억압의 대상이다. 이번에 전개된 반일시위는 억눌러오던 ‘민족주의’에 숨통을 조금 터놓자 즉각 폭발적인 양상을 보이며 터져나온 셈이다. 시위의 구호는 “일본 제품 배척”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반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등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치하에서 억눌린 인민의 불만이 기압을 상승시키며 잠재해 있는 것이다.


3주간의 ‘반일시위’ 배경엔 중국 일당독재에 눌린 불만 폭발
군중운동 ‘반정부’로 번질까 두려워
중 정부 ‘불길 잡기’ 혼신의 힘 쏟으며 고이즈미 신사참배 · 관료 망언엔 초강수

선전시의 반일시위를 보며 확인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중국에서 시위가 터져나올 때마다 거기엔 6·4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시위 군중 앞에 용기 있게 나선 리훙중 선전시 서기의 일장 연설을 <아주시보>가 천안문사태 당시의 자오쯔양에 빗대어 풍자한 것도 우연인 것만은 아니다. 중국 당국이 4월17일 마치무라 노부다카의 중국 방문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자카르타 발언을 계기로 반일 시위를 서둘러 원천봉쇄한 것도 1989년의 ‘동란’이 재연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은 틀림없다. 중국의 한 관리는 중국의 반일시위가 관제시위라는 시각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한다. “중국에서 반일시위는 늘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으며 결국 중국 정국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19년 반일·반제국주의 시위에서 출발한 5·4운동은 물론, 가까운 예로 1986년의 반일시위 또한 국내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성격이 변하면서 결국 후야오방 당시 총서기의 실각을 낳았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은 반일시위를 두려워한다. ‘민의’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잠시 두고 본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대규모 반일시위를 조장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어른거리는 6 · 4의 그림자

이후 중국 당국은 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선전대’를 조직해 전국 각 성을 돌며 대학생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당국의 정책을 설명하고 시위를 자제할 것을 설득하는 한편, ‘불법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엄단하겠다는 강온 양면책으로 반일시위의 불길을 잡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반일시위를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5·4운동 기념일과 6·4 천안문사태 진압 16돌을 거치면서 군중운동이 어떻게 발전할 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일의 함성소리가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의 도시에서 사라진 5월 초 이번 주말엔 왜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느냐고 베이징의 한 택시 운전사에게 물어봤다. “정부가 나서서 일본과 문제를 풀고 있으니까 참고 기다려 봐야지요.” 당국자가 알려준 정답과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한번은 저녁에 술을 마시다 술집 여종업원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인민들이 충분히 의사를 표시했으니까 정부의 일꾼들이 일본과 충분히 잘 협상을 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시위만 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또 한번 정답을 듣고 나니 더 이상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반일시위가 봉쇄된 뒤 한달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미봉이고 잠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번엔 중국 정부가 나서서 반일시위를 벌였다. 지난 23일 일본을 방문중이던 우이 부총리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회담하기로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서둘러 귀국해버린 사태가 그것이다. 외교사상 유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국가 최고 지도자와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일종의 고강도 ‘반일시위’인 셈이다.

중국은 우 부총리의 방일을 전후해 일본 우익세력이 조직적으로 중국에 대해 도발을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16일과 20일 잇따라 의회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관해 요설을 늘어놓았고 일본 정부는 17일 중·일 영토분쟁지역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와 암초섬 오키노도리를 ‘본적지’로 삼겠다는 주민 140명의 신청을 승인했으며, ‘망언 제조기’라 불리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오키노도리를 ‘시찰’하면서 중국을 ‘지나’라는 경멸적인 칭호로 불렀다.

중-일 ‘정권 대 정권’ 대결로

우 부총리 귀국 이후 26일 모리오카 마사히로 일본 후생노동성 정무관이 이번에는 “A급 전범은 불공정한 재판이 만들어낸 것”이라며 2차대전 뒤 도쿄 국제전범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망언을 내뱉었다. 중국은 다시 한번 들끓고 있다. 중국 인민들은 중국 정부가 일본을 반성하게 만들고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을 태세다.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반일감정이 다시 폭발하고 있다. 중국은 과연 국내의 7가지 억압을 임계점 아래로 억눌러두면서 일본의 도발을 응징할 수 있을까. 황지 화둥사범대학 교수(언론학)는 “일본이 중국의 현대화와 민주화를 파탄에 빠지게 하기 위해 의도적인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는 시각을 내놓았다. 중국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사석에서 “고이즈미 정권이 무너져야 중·일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과 일본은 어느 정권의 인장강도가 더 높은지 전면 대결에 들어간 셈이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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