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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2 18:27 수정 : 2005.06.02 18:27

- 보물 142호에 부쳐

혹시 서울 종로구 숭인동 123-1번지에 가보셨소. 거기 보물 142호인 동묘(東廟), 곧 동관왕묘(東關王廟)가 있소.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오. 관우현령(關羽顯靈)의 도움으로 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1599년 현액(縣額)과 비용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두 해 만인 선조 34년(1601)에 완성한 것. 선조실록에는 건축비용, 군사동원 등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조선왕이 과연 여기 참례할 것인가의 논란도 적혀 있고, 그 뒤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도 참례한 것으로 되어 있소. 우리 것만 보아온 사람에겐 건축은 썩 낯서오. 정면 5간, 측면 4간의 정자형(丁字形) 건물이며 검은 벽돌로 두텁게 쌓아올렸소. 정식 명칭은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좌우 현판은 사신 정룡(程龍)의 글씨 ‘만고충심(万古忠心)’ ‘천추의기(千秋義氣)’로 뚜렷하오. 목조로 된 관우상과 그 옆엔 아들 관평 등 부하 4인이 모셔져 있소. 또다른 명칭도 입구에 붙어 있소.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列武安聖帝廟)가 그것. 광무 6년(1902)에 우리나라에서 다시 붙인 명칭이오. 왕묘에서 ‘성제묘’로 격상되어 있지 않겠소. 이 사당 기둥과 추녀엔 명나라 흠차사신이라든가 청나라 제독 등 참배객의 현판들이 여럿 걸려 있소. 대명(大明) 만력(萬曆) 28년 경자 9월 길일(吉日)에 쓴 ‘충의관천(忠義貫天)’ ‘현성보번(顯聖保藩)’도 인상적이오. 관우의 현령으로 제후의 나라(조선)를 구했다는 것.

이 근처엔 고물상과 더불어 고서점도 있어 헤매다 지치면 이 묘에 들르곤 했소. 갈 데 없는 노인들, 무숙자의 보따리와 소주병이 뒹굴고 있기도 했소. 서울 장안 무속인들이 제물을 차려놓고 참배하는 것도 자주 목격했소. 담 밖의 아비규환과는 달리 조용하기 이를 데 없소.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이런 공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런 기묘한 물음을 물리치기 어려웠소.

<삼국지>를 떼를 지어 좋아하는 한국 독자들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이 관왕묘 앞에 선다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법 오래 전 산동성 곡부(曲阜)에 간 적 있소. 공자의 사당이 있는 기묘한 형태의 공자 무덤 앞 비석을 보았소. 1443년에 만들어졌다는 이 대리석 비석 명문은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廟). 가까이 가자 깨진 비석의 이음새가 뚜렷하지 않겠는가. 뿐인가. 왕(王)자도 간(干)자 모양으로 되었고 담벼락이 그 밑을 가리고 있지 않겠는가. 공자가 문선왕의 시호를 얻은 것은 당나라 현종 대로 되어 있소. 한족이든 이민족이든 역대 황제들은 과연 공자를 어떻게 대해야 했을까. 아무리 성인 공자라도 황제급으로 칭할 수는 없었을 터. 사당의 용트림 황색 기둥도 진짜 황제 앞에서는 붉은 천으로 가려야 했을 터. 이에 견줄 때 관우는 어떠했던가. 명나라 성화(1465~87) 무렵 관제대제(關帝大帝)로, 15세기 청나라 순치 때는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로 봉해져 한민족이든 이민족이든 국가 수호의 최고 군신으로 받들어졌소. 왕(제후)의 위치를 훌쩍 뛰어넘어 제(帝)의 자리에 군림하는 이 사태는 무엇을 가리킴일까.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공부한 바도, 민간신앙 도교를 살펴본 바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이 물음에 기껏 마주칠 수 있는 데는 명말 나관중이 쓴, 귀신 붙은 책으로 소문난 <삼국지연의> 정도. 진수의 <삼국지>에 바탕을 둔 이 얘기책은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하면 팩션(Fact+Fiction)인 셈. 기원전 2세기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 약 80년간 위·촉·오 삼국의 쟁패를 다룬 이 책에는 수백 명의 영웅호걸이 부침하지만 그 중 제일 영웅은 과연 누구일까. 너무 원만한 유비가 위선자로, 신출귀몰하는 제갈량이 요괴스럽고, 임기응변의 웅숭깊은 조조가 간웅으로 보이기 쉽지만 단 하나 우뚝한 인물이 있소. 신장 9척 수염 길이 2척 붉은 봉의 눈, 누에의 눈썹, 익은 대춧빛 얼굴, 종소리 같은 목소리의 사내, 긴 일월도에 적토마를 탄 사내. 화룡도에서 보여준 기품과 의리의 사내. 그 이름은 운장(雲長) 관우.


내가 읽은 <삼국지연의>는 관우 죽음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오. <춘추(春秋)>를 읽으며 적토마를 탄 관우가 전반부를 휩쓸고 있다면, 후반부는 현성(顯聖)한 관우가 휩쓸고 있소. 옥천산에 나타났고, 조조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아들 관흥으로 하여금 적토마와 일월도를 되찾게 했고 마침내 유학층도 민중도 함께 숭배하는 관성대제에 이르렀던 것.

종로구 숭인동 동묘 뜰의 벤치에 앉아 혼자 멋대로 중얼거렸소. 그토록 떼를 지어 이 책을 좋아하는 한국 독자들이 정작 그네 나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이 관왕묘 앞에 선다면 우리 유산인가 남의 유산인가를 따지기 전에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라고.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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