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9 14:38
수정 : 2005.06.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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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순/㈜필립스전자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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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인민, 혁명 같은 말은 검열에 걸리던 20년 전쯤, 빈약한 사실을 과잉열정으로 쓴 글들에 짜증 나 있던 내가 우연히 읽은 <중국의 붉은 별>은 풍부한 사실의 냉담한 기록으로 큰 충격과 감동을 준 책이었다. 꽤 두꺼웠는데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고난의 대 서사시를 읽는 듯한 장엄한 느낌이었다. 내용은 다 기억할 순 없는데, 처음 느꼈던 충격과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터넷 검색 창에 ‘중국의 붉은 별’을 치니, 책 소개(표지 사진이 나오는데 내가 읽었던 것과 다른 것 같다)와 ‘차례’가 주르륵 뜬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시안 행 완행열차, 장정, 대도하의 영웅들…. 아, 그랬었지, 다리 건너편에서 국민당 군이 총을 쏘아대는 그 사선을 뚫고, 목숨 걸고 다리를 건넌 장정의 영웅들. 목록을 보면서 글 줄기를 되살려본다.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는 1936년 접근이 봉쇄된 홍구로 들어가 4개월 동안 머물면서 직접 듣고 확인한 사실들을 꼼꼼하게 취재하여 <중국의 붉은 별>을 낸다. 이 책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같은 홍군 지도자와의 만남, 그들의 진술, 중국공산당의 전략, 시안사건, 국·공 합작 같은 사건 외에도,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혁명운동을 하고, 전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또 기층 민중과 어떻게 교감했나, 와 같은 의문에 대한 사실과 진술을 조목조목 싣고 있다. ‘어느 공산주의자의 내력’은 마오쩌둥의 어린 시절에서 홍군의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이력이다. 이 책은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혁명, 혁명가들의 일상과 이상, 그 치열한 이야기를 객관적 자료와 증거를 토대로 담백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마오쩌둥에서 무명의 어린 ‘소홍귀’에 이르기까지, 반봉건,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이념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정열과 신념으로 무장한 이 초라한 무리가 나중에 중국을 통치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는데, 그것은 1949년 기적처럼 현실이 되었다.
홍군이 세운 인민공화국은 부패·뇌물 선진국이 됐고 제국주의 길을 걷고있다
더없이 청렴했고 언제나 인민의 편이었던 감동의 전사들을 다시 볼수 있을까
제도 교육과 신문이 가르쳐준 중국은 중공이란 단어만 빼고 잘려나간 필름 같은 것이었다. 국·공 합작,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 냄, 인해전술로 ‘북괴’를 지원해 1·4 후퇴를 하게 만든 원수, 문화혁명과 권력투쟁, 홍위병, 가끔 신문에 나던 저우언라이 사진, 장칭 등 4인방이 체포된 신문 1면 사진…. 그 후, 복사지로 몰래 읽던 마오쩌둥과 혁명은 ‘전설’이었는데, 이 책이 들려준 국·공 분열의 이면, 홍군들의 더없이 청렴한 생활, 인민의 편이었던 홍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장제스 군대의 무시무시한 초공전을 뚫고 걸어서 이동한 대장정, 이 모든 이야기는 ‘전설’을 ‘사실’로 만들어준 감동이었다.
20년 전 ‘인간의 희생정신과 이타심의 한계는 어디일까’ 경외하며 <중국의 붉은 별>을 읽던 나는, 인민공화국의 한복판 신천지(상하이의 유명한 ‘먹고 놀자’ 구역)에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의 한계는 어디일까’ 궁금해하며 <중국의 붉은 별>을 떠올린다. 길가의 과일은 절대 따먹지 않고, 농작물은 반드시 소비에트 화로 제값 쳐서 주었던 홍군 전사들(얼마나 ‘정통’ 자본주의적인가!)이 세운 인민공화국은 부패·뇌물 ‘선진국’이 됐고, 반제의 기치로 출발한 중국 사회주의(봉건에서 자본주의를 생략한 직행 코스에서 역주행 중!)는 제국주의 길을 노골적으로 걷고 있다. 아니, 중국을 넘어, (경제)제국주의의 세계화가 내 곁까지 온 지금, 가장 험한 산을 넘고 가장 깊은 강을 건넜던 ‘대도하’의 전사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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