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9 16:23
수정 : 2005.06.0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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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딴지일보 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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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었다. ‘이건희 고대 해프닝’ 쯤으로 불러줘야 마땅한 일을 ‘5.2 사태’라 명하고 ‘평화’ 고대라 칭하는 이들이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는. 오, 귀엽다. 게다가 이들은 오로지 자발적으로 결집했으며 총학 사과를 목표로 학생들 서명을 받아내고 있단 이야기에 더욱 ‘므흣하게’ 깔깔댔다. 이들이 2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의 불신임 서명을 받아 총학 탄핵발의까지 진도가 나갔다는 소식을 접할 때까지도. 오오, 신나는 자율학습.
그러다 탄핵발의 기자회견의 내용을 듣고선 뚝, 우울해졌다. 시위의 취지까지는 공감한다는 그들은,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물리적 충돌로 인한 고대 이미지의 추락은 받아들일 수 없다 했다. 언론에 의해 폭력적 고대란 인식이 퍼져나가 고대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걸 지켜보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했다. 헉, 마음의 상처. 그 실추된 이미지의 내용이 뭐냐는 질문엔 답을 못한다. 컥. 이렇게 울다 웃는 급격한 감정기복은 항문모발기습생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선인들의 준엄한 교훈이 떠올랐다. 안 될 일이다.
2.
그들 행동 출발점은 ‘마음이 상해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속집단이 나쁘게 비쳐지는 데 각자 ‘마음 상했다’. 그리고 그걸 고대의 이미지 실추라 표현했다. 그런데 그 실추됐다는 이미지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한다. 진짜 ‘5.2 사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발한다.
내 기분이 나빠서… 라는 개인적인 동인에서 출발했다는 걸 비난할 이유는 없다. 정치는 애초 개인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분노, 희망이 집단화되고 그 최대공약수가 모색되는 과정에서 정치는 탄생했다. 오히려 정치가 담론화, 관념화되며 구체적 개인이 실종되어 왔던 것이 문제였다. 1970-80년대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조국의 민주화 앞에 개인의 행복을 주절대는 건 사치를 넘어 반동이었다. ‘뽀대’도 나지 않았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거대 서사 없이 정치를 논할 수 없었다. 남성중심의 공적 지배구조를 뒤엎기 위해 가장 사적인 것부터 문제제기하고 나섰던 여성운동은, 그래서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고대 이미지 추락시켰다”
맘 상한 ‘개인’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제 행동 맥락도 모르다니
거대물주 향한 아양이 빚은 해프닝에
아, 웃다가 울다 ‘똥꼬’에 털 나버렸다
<평화고대>의 액션은, 개인의 분노가 유예도, 포기도 되지 않고 거대한 시스템 자체를 문제제기하는 데까지 나갔다는 점에서, 본질적 의미의 정치가 구현되는 장면이다. 이게 원시적 의미의 민주요, 정치다. 기존의 권력 상징과 그 작동 방식을 급속히 해체한 IMF(국제통화기금)와 인터넷이 열어 낸 신세계. 쥐뿔도 모르는 수습이 조직 위계를 간단히 점프해 사장에게 메일을 보내고, 울릉도 고삐리가 서울의 대통령이 직접 보는 게시판에 글을 쓴다. <평화고대>는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시대의 산물이다. 이제, 개인 정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당위나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적 동인으로 충분하다 인식하는 세대의 등장으로. 이건 희망이다.
3.
벗트 그러나. 희망과 동시에 허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고대의 ‘이미지’ 실추에 관해 질문 받을 때 당황한 건, 당연한 결과다. 내가 기분 나쁜 것과 고대 이미지 실추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로직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개인의 정서를 조직의 담론으로 무장할 논리와 수사가 없었으니까. 그들의 분노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정치는 거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 분노의 최대공약수 역시 개인적인 분노라는 컨텐츠로 끝이다. 기분 나쁜 것이 그냥 기분 나쁜 것에 그치고 만 것이다. 학생들 개개인의 대의기관인 총학이란 공적 시스템 자체를 전복시켜야 할 만큼의 정치적 의의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건 세계관이 할 일이다. 그들 액션이 가진 본연의 원시적 정치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소한의 이데올로기조차 만들어내지 못할 만큼 몰정치적이었던 게다. 그 결과, 니들이 기분 나쁘다고 총학을 뒤집어야 하냐는 아주 간단한 반격에조차 답할 수 없었다.
시대에 의해 과도하게 학습됐던 70, 80년대의 개인들은, 민주를 열망하는 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닥 민주적이지 못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근대적 개인을 다룰 줄 몰랐다. 그들은 근대적인 만큼, 딱 그만큼 봉건적이고 집단적이었다. 그들을 지금 다시 대학으로 돌려보내도 <평화고대>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고대> 세대는 그 대척의 언저리에 서 있다. 개인으로도 시스템 자체를 당당히 시비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면서, 자신들 행동이 가진 정치 사회적 맥락조차 읽지 못하는 정치성의 부재. 이건, 허망하다.
4.
거대한 고용주이자 매머드 물주 이건희를 향한 잠재 구직자와 수혜자들의 아양이 빚어낸 호들갑에서 출발한 이 해프닝은 그렇게, 시대 정치성의 희망과 허망을 동시에 드러내며 끝이 났다. 아, 털은 끝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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