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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9 19:22 수정 : 2005.06.09 19:22

최하림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문호리는 공사 중”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양수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는 예쁜 동네 문호리는 사방이 파헤쳐진 채 공사용 트럭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짓다 만 건물이 흉한 몰골을 드러낸 채 방치되어 있기도 했다. 그 소란한 ‘공사 중’ 속에서 최하림(66) 시인은 풍경을 관조하며 시를 쓰고 있는 중이다. 충북 영동군 호탄리 금강변 마을을 떠나 이곳에 자리잡은 지 4년째. 시인이 문호리 시편 60여 편을 묶어 새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랜덤하우스중앙)를 내놓았다.

문풍지 떨림이 나의 떨림으로

지난 두 권의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와 <풍경 뒤의 풍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우선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에 주력한다. 풍경은, 더구나 강물과 숲과 새와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풍경은 그 자체로 충만한 가치이자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인간적 맥락과 의미를 개입시키는 것은 부질없는 참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필요한 것은 대상과 주체, 자연과 인간의 상호조응일 따름일지도.

“그런 순간에도 목조 건물의 유리창과 하수구에서는 간간이 얼음이 얼어터지는 소리 들리고 문풍지들이 바르르 바르르 떤다 나는 벌벌 떨면서 둘째 딸이 신혼여행길에서 사다 준 털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나는 털스웨터를 입고 책상에 앉는다 나는 시를 쓴다”(<지난 겨울 기억>)

“지구는 멀리 궤도를 돌아간다/나는 산 밑을 돌아간다/마을 앞 삼거리에는 한 사내가 서성거리고/느티나무 아래 새들이 기다리고 바람이/물처럼 흘러 개울을 빠져나간다”(<나는 산 밑을 돌아간다>)

앞의 시에서 문풍지들의 떨림은 ‘나’의 떨림으로 옮겨 오고, 뒤의 시에서는 지구의 궤도 회전과 ‘나’의 우회, 사내의 서성거림과 새들의 기다림, 바람과 물의 흐름이 각각 조응하며 서로를 비춘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비추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순간은 그러나 드물고 위태로운 것이다. 시인이 묘사하는 관조와 조응의 메커니즘은 많은 경우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데, 이번 시집에서 유리창의 그런 기능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표방되고 있음은 충분히 주목에 값한다.


“아침부터 나는 줄곧 유리창을 보고 있었으나/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말할 수가 없었다//많은 것들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오래된 우물>)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이유라도…//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메아리>)

유리너머 풍경은 희미한 무엇

앞의 시에서 유리창을 통한 관찰은 사태의 명료한 파악에 이르지 못한 채 다만 ‘희미한’ 움직임의 포착에 그칠 뿐이다. 뒤의 시에서 수면이 깨어지는 장면은 가히 ‘풍경의 파탄’이라 이를 만하다. 이 경우 수면은 유리창의 대신이라 할 터인데, 그러니까 수면의 깨어짐이란 곧 관찰의 실패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관찰은 어떻게 해서 파탄에 이르는가. 다음 시를 보자.

“아아 숲 속에는/숲의 집 속에는/피 흘리던 날들이 있다/유리를 뚫고 천길 벼랑을/뛰어내린 뼈아픈 날들이 있다/이한열과 박종철이 있다 김상진이/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 있다 돌아보고/돌아보라”(<지리산 넘어 수십만 되새들이>)

강물과 숲과 빛과 어둠…
문호리 풍경 관조하며
“나는 무엇인가에 발목이
잡혀 옴싹달싹 못한다”
유리창적 태도 성찰

▲ 일곱 번째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를 펴낸 시인 최하림씨가 북한강변의 단골 카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시와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의 ‘유리’가 반드시 관찰의 매개체인 유리창과 같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리’가 천길 벼랑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서, 피 흘림과 뼈아픔을 막아 주는 방어벽 노릇을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풍경에 개입하지 않고 주체로 하여금 다만 관찰하고 기록하도록 할 뿐인 유리창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풍경에 대한 개입을 요청하는 어떤 ‘목소리’가 있고, 시인은 그 목소리에 귀를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안개는 물 위로 떠올라 강을/덮고 마을을 덮는다”(<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는 이치를 충분히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에 걸려 더러는 시체처럼 //쌓이고 더러는 썩고 문드러져 떠내려간다”(<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는 탓이다.

죄의식의 기저는 ‘사이 의식’

유리창을 사이에 둔 관조와 개입 사이의 길항에 관해서라면 <촛불을 들고>가 시사적이다. 이 시에서 유년기 고향 소도시에서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밀고 초콜릿을 종이처럼 뿌렸”던 미군들의 기억은 “미군 전차가 두 여중생을 깔아뭉개 죽인 사건”과 겹쳐지면서 역사적 맥락을 획득한다. 이 때의 유리창은 바깥을 구경하고 희롱한다는 의미에서 ‘관조’의 나쁜 형태를 구현하는 것인데, 그래서 “나도 촛불을 들고 시청 앞으로 갔다(…)나도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 외쳤다”는 시의 마무리는 ‘유리창적 태도’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이해될 법하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인이 ‘유리창’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라리 그는 유리창의 안과 밖 사이에서 망설이고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는 무엇인가에 발목이/잡혀 옴짝달싹 못한다 나는 올라가지도/내려가지도 못한다”(<북한강>)

“나는 순수주의와 역사주의 사이에서 부딪치고 부서진다 나는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외몽고>)

이번 시집의 기저에 깔려 있는 죄의식이 이런 ‘사이 의식’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빗속으로>라는 시는 장맛비 속의 자동차 운전을 소재로 삼은 작품인데, 빗물을 타고 찻길에 내려온 수백 마리 산개구리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운전자의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시인 자신으로 짐작되는 화자-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헤드라이트를 켜 보고는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내서 산길을 지나가는 것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는 시의 결구는 방황에 이은 어쩔 수 없는 작죄(作罪)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구석방>)거나 “나는 누구인가를 기다리며 죄짓고 있다//오래오래 누워 죄짓고 싶다”(<오래오래 누워>)는 다른 시의 구절들은 일상화한 죄의식,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긴장과 자극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반어적 표현으로 읽힌다.

양수리/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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