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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수교 열흘 뒤 베트남 전투병 파병 |
1965년 6월22일 ‘일본국과 대한민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 체결돼 미국이 종용해온 한-일 국교 ‘정상화’가 마침내 이뤄졌다. 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 재일 한국인 법적지위 협정, 어업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 협정 등도 함께 조인됐다.
그 열흘 전인 6월11일 응웬 반 티우, 응웬 카오 키 등이 쿠데타로 남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세웠고, 조약 체결 열흘 뒤인 7월2일에는 한국정부가 베트남에 전투부대 1개 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앞서 3월8일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베트남전 직접 개입이 시작됐으며, 4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베트남에 지상군을 파병하기로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뒤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으나, 한국에겐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으나 ‘이미 무효’라는 말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국은 서로 전혀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은 ‘병합’조약 등의 체결 당시까지 거슬러올라가 그런 조약 자체가 애초부터 무효였다고 해석하는데 반해 일본은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원래 합법이었던 과거 조약들이 비로소 무효가 됐다고 해석한다.
일본은 한국‘병합’ 합법론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국가배상을 할 이유가 없다고 강변했으며, 실제로 기본조약 본문에는 배상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한반도에 남겨둔 자국 자산이 53억달러에 이른다며 이의 반환청구 포기에는 사실상 배상금 지불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면서, 인도가 독립할 때 영국인이 인도에서 갖고 있던 개인자산권을 인정한 사실을 주요 사례로 들고 있다.(‘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이는 마치 무장강도가 남이 집에 무단침입해 가족과 그 재산을 강탈 유린하고 수십년간 눌러앉아 주인행세하며 살다가 안팎의 힘에 의해 밀려날 때 사죄는커녕 그때까지 그 집에서 마음대로 해온 모든 권리와 재산은 몽땅 자기가 만든 것이니 내놓으라고 큰소리치는 것과 같다. 소위 국제법상의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강대국, 강자 위주로 돼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은 그 자산과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 등 자국이 제공한 이른바 ‘경제협력’자금이 ‘한강의 기적’의 토대가 됐다고 지금도 자랑한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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