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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6 16:06 수정 : 2005.06.16 16:06

이재현 작가

현충일과 6.25가 들어 있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하지만, 내게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인 이유는 6.3, 6.10, 6.15와 같은 날들 때문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만큼 6월에는 김구, 여운형, 조봉암은 물론이고 전태일, 이한열, 박종철을, 또 문익환과 김남주를, 그리고 효순과 미선을 기려야 한다.

기려야 하는 고인들의 목록에 나는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을 덧붙이고 싶다. 이 분들은 30년 전에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흔히들 이 사건을 유신정권이 자행한 ‘사법 살인’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정치적 살인이다.

중정, 남조선해방전략당 작명

더 나아가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올해 5주년을 맞은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을 진정으로 되살리고자 한다면, 권재혁, 이재문, 신향식도 복권시켜야 한다고. 권재혁은 1968년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이재문과 신향식은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세 분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시골 사시는 어머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죽은 다음에 서럽게 울지 말고 살아 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내려오너라.” 맞는 얘기다. 그래서 오늘은 지면으로나마 김병권 선생을 찾아뵙고자 한다. 난 한 번도 김병권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다. 김병권 선생은 1921년생이니까 만으로 84살이시다. 지난해 여름에는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신 바 있다. 요즘은 안산시 대부도의 노인복지시설 ‘행복의 집’에서 살고 계신다는데 노환으로 점점 더 기력이 쇠하셔서 걱정이라는 소식이 안산통일포럼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와 있다.

약력에 따르면, 김병권 선생은 대구 출생이다. 김 선생은 4.19혁명 당시에 사회당 대구지부와 민족자주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다가 5.16쿠데타 직후에 반 년 넘게 구속된 적이 있었다. 다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에 엮여 붙잡혀서는 5년간 복역한 뒤 1973년에야 다시 햇볕을 보게 되었다. 그랬다가 1976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9년 남민전 사건 때 들어가서는 무려 12년이나 징역살이를 하고 1988년에 출소했다.


보안법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이 뭔지
세상은 아무도 기억 않는다

1990년대 들어서 통일운동이 30년만에 다시 고조되자 김 선생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고문, 사단법인 민족화합운동연합 상임고문 등을 지내셨고 6.15공동선언 이후에는 선언 실현 현수막 걸기, 광고판 설치, 사진 보내기 활동을 하셨다. 노구를 이끌고 통일운동에 매진하셨을 김 선생의 헌신성과 열정을 떠올리자면, 늘 말로만, 그리고 머리로만 통일을 떠들거나 생각해 온 나 자신이 매우 부끄러워진다.

김병권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은 서클 수준의 조직이었다고 한다. 물론 차츰 당 조직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있었지만 당시는 그렇게까지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직접 말을 들어보자. “당시 우리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을 사용?적이 없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냐 하면 사건 당시 중정에 압수된 물품 중에 권재혁 씨가 세미나 때 발표한 논문이 있었어요. 그 논문 제목이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입니다. 그 제목을 따서 우리 조직 명칭이라고 갖다 붙인 것이죠.” 내 짧은 식견과 경험으로도 이 얘기는 맞는 것 같다. ‘전략당’이란 명칭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증언에 나오는 권재혁은 1925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조지타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 후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4.19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오자마자 곧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직했다.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이한림 장군과의 친분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육사에서 나온 이한림이 수산개발공사로 옮기자 권재혁도 그 곳의 영업 책임자로 따라갔다고 한다. 권재혁은 이 곳에 적을 두면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에 연루된 분들과 점차 동지적 관계를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 ‘잊혀진 애국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하고 기려온 남다른 행보를 이 사회는 기억해줄까? 사진은 지난 2003년 12월 서울역 지하철 역내의 ‘6.15 남북 공동선언’ 실천 촉구 광고판 앞에 선 김병권 선생.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잊혀진 민족주의자 권재혁

“권재혁씨가 사형까지 받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일본 총련계와 접촉했다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직에 이형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누이가 총련 오사카 지부의 간부로 있있었거든요. 당시 권재혁씨는 미국에 본사를 둔 참치회사의 한국사무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오갈 수 있는 복수여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일로 일본에 가는 길에 어려운 이형락의 형편도 얘기할 겸해서 그 누이를 만난 모양입니다. 누이에게 돈을 직접 지원받지는 않았는데 총련계와 접촉했다고 해서 사형이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니죠.”

김병권 선생은 90년대 말부터 권재혁의 기일인 11월4일이면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인 독립공원 사형장 건물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잊혀진 애국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민족주의자’ 권재혁에 대한 애끓는 추모와 신원(伸寃)의 뜻을 담아서 말이다. 그런데 김병권 선생이 몸을 움직이시기가 힘들다고 하니 이제 누가 그 기일을 챙길 것인가.

분단장벽 뛰어넘다 18년 옥살이
지친몸 통일운동 앞장 뇌졸중 투병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5년의 징역살이 끝에 출감한 김병권 선생은 이듬해인 1975년 5월 대구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김 선생은 이재문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재문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해낸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통혁당 관련자인 신향식과 더불어 세 사람은 1976년 2월29일 청계천 3가의 어느 중국 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 결성식을 거행했다. 그 전 해에 희생된 인혁당 관련자들의 속옷을 모아 남민전 깃발을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햇수를 따져보니, 이재문과 신향식 두 분이 돌아가신 것은 바로 지금 내 나이 무렵이다. 아아, 하지만 이제는 이런 게 모두 다 옛날 얘기다. 이 달 초에 수능 모의고사를 본 내 딸은 인혁당이 뭔지 통혁당이 뭔지 남민전이 뭔지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이름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게 있기도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없다. 굳이 국가보안법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국민 동생’ 문근영의 가족사를 통해서만 이런 얘기를 슬쩍 엿듣게 된다. 문근영의 외할아버지인 류낙진 선생은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가 구속됐다. 류 선생은 전남 보성의 중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1971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년 만에 가석방되었지만 94년 또다시 구국전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다고 한다.

안산에는 김병권 선생 말고도 표문태, 박기래, 석달윤 선생과 같은 통일운동의 원로들이 사신다고 한다. 아흔이 넘으신 표문태(1914년 생) 선생은 거동이 불편하셔서 바깥걸음을 못 하시고, 박기래(1926년 생) 선생과 석달윤(1934년 생) 선생은 휴일에도 산림감시원 일을 하신다고 한다. 살아계신 분 모두 건강하시고 더 오래 사시기를 빈다.

배우 문근영 가족사만 관심

“어떻게 세운 나란데…” 하는 말은 우익 인사들이 잘 쓰는 슬로건이기는 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절로 나온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은 황우석, 안철수, 박주영 등이겠지만, 권재혁, 이재문, 신향식과 같은 분들이 이 땅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광복 60년을 맞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직업과 일이 있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힘든 일은 세상 자체를 뒤엎고 바꾸는 일이다. 40년 전에 ‘미 제국주의의 번견(番犬)’으로 불리웠던 박정희가 지금은 일종의 시이오(CEO·최고경영자)로 재평가받는 데다가 전두환 팬클럽도 생긴 마당에 이 분들이 복권되지 말란 법은 없다. 물론 아직 국가보안법은 시퍼렇게 살아있지만 말이다.

신록이 더 짙어 가는 계절이다. 이런 계절에는, 문정현 신부의 표현을 빌린다면,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모여 함께 춤출 날’을 만들어야만 한다. 시인 이기형 선생도 고인들을 추모하는 시에서 간결하고도 감동적으로 노래한 바 있다. “겨레와 나라를 사랑한 것밖에 죄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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