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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6 16:17 수정 : 2005.06.16 16:17

조선유학과 서양과학의 만남

조선후기를 풍미한 북학론은 주자 성리학의 자기변용·발전인가? 아니면 성리학과 단절된 근대적 성격의 것인가? <조선유학과 서양과학의 만남> 지은이는 어느 견해도 마뜩찮다. 전자가 도덕적 차원인 심성론을 근대 자연과학적 인식과 무리하게 연결하였고, 후자는 북학론자들 역시 ‘소중화’라는 화이관에다가 심성론을 존숭했다는 점에서다. 전·후자 모두 북학이 서구적 개념에 대한 대응논리 또는 그것과 대등한 사상체계임을 강조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본다.

하여, 지은이는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시대정신’의 주박에 벗어나 당시 사회분위기에 주목하고 서구과학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딴지를 건다.

우선 지은이는 조선 지식인 사회가 청나라를 어떻게 보았는가에 눈길을 준다.

청은 병자호란의 참상을 안겨준 불구대천 원수나라다. 대청복수론의 뒷면에는 대명의리론이 있다. 북벌론, 명나라 황제들의 제향, <존주휘편>의 편찬 등이 그것에 따른 것. 그러나 조정은 청나라에서 서양역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지은이는 척화를 강조하는 명분론과 선진문물 도입로라는 현실론이 병존했다고 본다. 천인합일을 통치의 뼈대로 하는 조선 군왕에게 정확한 천문관측을 통한 역법의 시행은 중요한 과업 중 하나였다. 개국 이래 서운관, 관상감을 중시하고 칠정력을 도입하였던 내력이다. 서양 천문역법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게 지은이의 판단이다. 호란 이후에도 역관을 보내 서양역법을 배워오게 한 것은 효종대 북벌론이 사그라들면서 양국관계가 화해국면으로 접어든 탓이라기보다 조선 정부가 애초부터 취해온 천인합일론에 근거한 역법에 대한 태도의 계속이라고 본다. 18세기 들어 관상감 관원들이 연경 천주당을 방문케 하고 나중에는 사행원들이 서양인을 직접 찾아가는데까지 확대되었다.

천주교도의 신주소각 사건(정조 9년)은 정약용이 전향서를 써야 할 만큼 심각했으나 중국문화와 오랑캐인 청을 구분하자는 ‘도기분리론’을 낳았다. 이용후생이 전통유학의 본지다(중국원류론), 그것이 명나라의 복수를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

지은이가 책의 앞부분 70% 이상을 할애하면서 숨가쁘게 달려온 것은 최한기를 말하기 위한 준비운동.

“선각적 개화사상가” 평가 받은
최한기 정치적 입장에 주목
‘유교적 경세관’ 실현 위해
서양학문 이용했다는 점 강조
‘내재적 발전론’에 딴죽

%%990002%% 최한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서양역법 수용의 정신이 그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이론화되고 있고, 그가 중세 유학사상의 말미에 있어 장기간에 걸친 서양인식의 대단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독특한 기철학으로 실학이 개화사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마련했다”, “서양의 근대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기국통상론을 주장한 선각적 개화사상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가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나 정치제도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를 보면 그런 평가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지은이의 평가다. 한마디로 그는 동도서기론자다.

그의 저술은 국왕의 보도와 백성의 교화, 즉 유교적 상도를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기왕의 사림파의 인식에 닿아있다. 다른 점이라면 자연과학적 지식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 하지만 변화된 민의 위상과 지방민의 동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중앙의 정치구조와 정치행태에 관심을 집중시켜 그 변통책을 강구했을 뿐, 기본이 되는 토지개혁 사상은 선행 실학자의 수준에 못 미친다. 서양에 대한 지식 대부분이 인식론적 차원의 저술이 아니라 수입된 서학서들의 체계적인 요약정리 수준이라는 점, 저술활동의 마무리가 58세 때의 <인정>(1860)이라는 정치 관련 저술인 점도 그의 목표가 경세관의 정립이라는 방증이다.

그가 제창한 ‘신기(神氣)’도 실제로는 근대적 물질개념, 사람의 영묘한 지각작용의 개념 등 이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물심이원론의 미분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기를 앞세운 그의 물심일원 입장은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 기철학이 근대적 사유방식을 제공하기에는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본다. 오히려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 했던 홍대용보다도 덜 근대적인 태도라 지목한다.

그가 남다른 것은 종래의 중국원류설을 떨치고 서양의 천문지식이 근래에 발견된 매우 정확한 지식이라는 점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논의는 군왕의 학문인 천문학으로 귀결돼 그의 유교적 경세관과 연결된다. 후대에 와서 더욱 밝혀진 역리와 물리를 가지고 후세에 도리어 어두워진 상도와 중도의 회복을 주장한 최한기의 태도는 전통적인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양학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평가다.

요약하자면, 조선 후기에 북학이 고조된 것은, 조선정부가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꾸준히 추진해온 서양역법의 채용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북학론의 내재적인 발전론은 구태여 그렇게 보려한 시각 탓에 과대평가라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지은이 박성순 교수는 <선비의 배반>(고즈윈 펴냄, 2004)을 통해 기존의 민족주의적 시각과 다른, ‘당쟁과 사림파가 조선을 망쳤다’는 논쟁적인 주장을 편 바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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