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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6 16:49 수정 : 2005.06.16 16:49

호남인들의 남다른 결속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사진은 지난 1992년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후보 유세 장면. 김씨는 97년 네번째 도전에서 성공함으로써 호남인들의 묵은 정치적 한을 풀었다. 보도사진연감 93


“우리 향우회는 흔히 고려대 교우회, 해병대 전우회와 함께 결속력이 아주 강한 국내 3대 단체 중 하나라고 자랑하고 자부합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재경 광주·전남 향우회 정기총회에서 임향순 회장이 한 공식 인사말의 한 대목이다.

향우회는 일반 명사다. 충청향우회, 강원향우회 등 출신지역에 따라 모임을 만들면 그게 곧 향우회다. 그렇지만 호남향우회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끈끈하게 잘 뭉친다는 것이다. 그 끈끈함의 이면에는 슬픈 역사가 있다. 지역차별이다.

전국 어디에나 호남향우회가 있다. 부산에도 있고 울산에도 있다. 물론 가장 활발한 곳은 인구가 많은 수도권이다. 수도권의 호남향우회는 출신 시군에 따라 수도권 전체 회원들이 모이는 ‘재경00향우회’가 있고, 현재의 거주지인 구나 동 단위로 호남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모여서 구성한 ‘00호남향우회’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전자는 일종의 ‘단체형’ 조직으로 명망가 중심이며 회칙을 제대로 갖추었다. 사단법인인 곳도 있다. 수백명이나 수천명 단위로 모인다. 그러나 후자는 ‘풀뿌리형’ 조직으로 자영업자들 중심의 동네 상조회 성격이 강하다. 회원은 수십명 단위다.

‘단체형’을 먼저 설명하자. ‘단체형’으로 가장 큰 조직은 ‘재경 광주·전남 향우회’다. 1955년 결성된 전통의 조직이다. 역대 회장 면면을 살펴보면 화려하다. 초대 회장은 김동현 대법관이었고, 김준연, 서민호, 고재호, 고재필, 기세훈, 정래혁, 장지량씨 등이 뒤를 이었다. 수도권에 사는 광주·전남 출신 ‘500만 향우’를 기반으로 하지만, 실제 등록된 임원은 1500명, 일반회원이 1200~1300명이다. 1년 예산규모는 2억원 정도다. 장학사업, 회원 경조사, 신년교례회, 고향방문 등을 한다. 2004년 관악구 신림8동에 향우회관을 마련해 입주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www.gwangjeon.com)까지 번듯하게 갖추고 있다. 하지만 실제 활동은 광주를 포함해 23개 시군을 근거로 구성된 25개의 시군별 향우회가 훨씬 더 활발하다. 고흥, 신안, 곡성, 해남 등 군단위가 잘 되는 편이고, 광주, 광양, 나주 등 큰 도시는 잘 안된다고 한다.

‘재경 전라북도민회’(회장 이연택)도 있다. 1988년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황인성씨였고, 창립총회 사회를 순창 출신인 정동영 당시 문화방송 기자가 맡았다. 수도권에 사는 전북출신 ‘200만 향우’를 기반으로 하며, 현재 5000명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있다. 고건, 고병우씨 등이 이 조직의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장학사업, 토론회, 신년하례회, 정기총회 등이 주요사업이다.

단체형 · 풀뿌리형으로 나뉘어

전북도 전체 도민회보다는 시군별 향우회가 훨씬 더 활발하다. 우선 역사가 도민회보다 길고 조직적으로도 탄탄하다. 시군별 향우회가 사실상 전북도민회를 만들었다. 전주를 제외하고 13개 향우회가 결성돼 있다. 군산 강봉균, 정읍 김원기, 김제 임휘윤 등 정관계 명망가들이 회장을 맡는 경우도 많다. 정기총회나 신년교례회에는 수백명씩 참석하지만, 선거를 앞둔 특별한 경우에는 수천명까지 모이기도 한다. 정읍, 군산, 순창 등이 특히 잘되는 모임이다.

이렇듯 ‘단체형’ 호남향우회는 공조직의 냄새가 난다. 회원들도 서울에 올라와서 그런대로 성공한 호남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중소기업인, 자영업자, 회사원, 공무원 등이 주축이다.

이에 비해 ‘풀뿌리형’ 호남향우회는 성격이 전혀 다른 조직이다. 우선 전남과 전북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냥 같은 동네에 사는 호남 출신이면 회원 자격이 있다. 회원은 동네 음식점, 가게, 이발소, 세탁소, 토건업, 건설자재상, 복덕방 등 소규모 자영업자 중심이다. 회사원은 많지 않다. 이름도 호남향우회, 호남동지회, 나향동지회, 호림회 등 매우 다양하다. 규모는 동네 사정에 따라 많이 다르다. 40~50명이면 많은 편이다. 이런 조직이 전국에 도대체 몇개나 있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사람사는 게 다 그렇듯이 서로 싸워서 갈라지기도 한다. 모든 동네에 다 있는 것도 아니다.

부산…울산…전국 어디에나 있다
뿌리깊은‘지역차별’ 아픔에
서로 형님, 동생 부르며
다른 곳보다 유난히 잘 뭉쳤다
‘김대중 선생’ 집권에 정치적 한 풀고
2세들은 ‘서울사람’이 다 됐다
출신지 따지기 점점 의미 잃어간다

‘풀뿌리’ 호남향우회에서는 대체로 나이가 계급이다. 회원 명부를 만들면 호적상 나이가 아니라, 실제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 호칭도 ‘형님’, ‘동생’, ‘자네’로 정리된다. 자영업자들이 많다 보니 자연히 동네에서 서로 돕고 살게 된다. 이왕이면 형님네 가게를 이용하고, 같은 값이면 동생네 음식점을 이용하는 식이다.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기본이다. 그래서 상조회 성격이 강하다. 모임은 월 1회 월례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사는 얘기, 아이들 교육시키는 얘기, 정치 얘기를 주로 한다. 2년 전부터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패가 갈려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 선거 때 동원되는 호남향우회도 바로 이런 동네조직이다. 향우회 임원이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검찰이나 선관위의 조사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호남향우회가 선거에 깊숙히 개입하는 이유는 물론 호남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호남과 정치는 불가분이다.

향우회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직업별 조직도 있다. 전북 출신 공무원들의 ‘삼수회’라는 모임이 있다. 삼수회는 동진강, 섬진강, 만경강 등 세 물줄기를 의미한다. 전주고 출신 언론인들의 모임인 ‘전언회’도 있다. 전언회는 최근 전북에 있는 고교 출신으로 회원 자격을 확대했다. 평준화 세대 이후 맥이 끊기게 생겼기 때문이다.

거주지가 아니라, 직장을 근거로 한 호남향우회도 꽤 있다. 다만 직장 호남향우회는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직장내 다른 지역 출신들의 눈총 때문이다.

호남과 정치, 뗄 수 없다?

이쯤에서 호남향우회의 그 ‘끈끈한 유대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호남 사람들에게 ‘호남 사람들은 도대체 왜 결속하는지’ 이유를 물어 보았다.

위동환 재경 광주·전남 향우회 사무총장은 “농사를 짓다가 객지에 가서 설움을 당하면 뭉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호남 차별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호남지역 차별이 시작됐다. 신라는 죄인들을 전라도로 유배보냈다.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호남 차별은 이어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호남사람은 이웃에 살지도 못하게 하고, 삼성같은 대기업에서도 호남 출신들은 뽑지 않던 때가 있었다.” 위 총장은 “그렇다고 호남인들이 다른 지역을 원망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향우회 회칙 4조를 찾아서 보여줬다. “…상호친목을 도모하며 향토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고향사랑을 나라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향우회의 끈끈한 정을 나라사랑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정치를 하면서 ‘풀뿌리’ 향우회를 자주 접해본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도 비슷하게 진단했다. “서울 변두리로 진출한 호남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대체로 생활력이 강하고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뭉쳐야 했다.” 그는 “호남향우회의 결속력이 최근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며, 그 이유로 △김대중 대통령 당선 △2세들의 현지화 두 가지를 들었다. ‘호남의 한’이 결속의 원동력이었는데, ‘김대중 선생님’의 집권으로 정치적 한을 어느 정도 해소했고, ‘서울사람’인 2세들은 향우회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호남사람들은 같은 설명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철도와 도로가 부산으로 깔렸고, 박정희의 개발독재 시절에도 산업시설이 영남에 몰렸다. 호남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서울이나 경상도로 몰려 갔다. 호남사람들은 공돌이, 공순이, 구두닦이, 술집 웨이터, 술집 아가씨로 취직을 하거나 시장에 좌판을 깔았고, 악착스럽게 살았다. 현지인들은 그런 호남사람들을 멸시했다. 호남사람들은 뭉쳐야 살 수 있었다.”

전직시장 · 미화원 동등한 회원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된 계기는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김영삼씨와 김대중씨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실패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남향우회를 취재하다 보니, 이른바 ‘3대 마피아’로 불리는 호남향우회, 고대교우회, 해병전우회 세 집단에 모두 속한 사람도 찾을 수 있었다. 초대 민선 의왕시장을 지낸 신창현 환경분쟁연구소장(52)이었다. 그는 전북 익산 출신으로 남성고를 다녔고, 고려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졸업 후에는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해 3년간 복무했다. 신창현 소장도 호남향우회의 결속력을 쉽게 설명했다. “돈 없고 빽 없어서”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초에 잠시 살 때 봤던 함경도민회 얘기를 했다. 실향민으로서의 아픔을 서로 보듬고 친형제처럼 살더라는 것이다. “아픔이 클수록, 수가 적을수록 잘 뭉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가 속한 지역향우회에는 전직 시장과 환경미화원이 동등하게 회원 자격으로 참여한다.

그런 호남향우회에 대해 다른 지역 출신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극성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남이 오랫동안 받은 핍박을 생각하고 역지사지해 본다면 그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세대가 지날수록, 세상이 합리적으로 변해 갈수록, 정보·통신이 발달할수록 출신지역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게 돼 있다. 예상보다 급속히! 성한용 기자 shy99@hani.co.kr


한 달 전 ‘고대 마피아’를 썼을 때 인터넷 한겨레에서 난리가 난 일이 있다. 흥분한 세 사람이 전자메일로 항의의 글을 보내왔다. 고대가 왜 마피아냐는 내용이 두 건, 한겨레가 교묘하게 고대를 홍보해줬다는 내용이 한 건이었다. 그냥 주말판에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쓴 것이라고 해명을 하자, 그제서야 “이해하겠다”는 메일이 다시 왔다. ‘호남향우회’를 쓰기 전에 약간 망설였다. 지역문제는 어떻게 써도 욕먹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쓰기로 했다. 기자를 왜 하는데? 다만 공연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 자신을 간략히 소개해 두겠다. 나는 46살로 고향은 대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서 중·고등학교, 대학을 서울에서 졸업했고 지금까지 수도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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