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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6 17:37 수정 : 2005.06.16 17:37

‘선비’는 시야가 넓다. 패거리를 짓지 아니한다. 바름과 옳음에 목숨을 걸고 산다. 그는 나라를 제일 위에 두고, 겨레를 걱정한다. 나라와 겨레가 잘되면 그 속에서 내가 잘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선비다.

고조선 배달겨레로는 순임금이 선비였다.

후조선에 와서는 세종임금이 선비였다. 선비는 겨레를 편하게 만든다. 세종은 만세에 이르는 배달겨레 선비다. 평양에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자고 한 사람이 세종 때 사온주부 정척이었다. 세종은 정척이 주장한 글을 읽더니만 즉석에서 그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그때(1425) 임금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선비는 천성으로 타고 난다.

세종이 만든 조선글자를 집현전 학사 일곱이 반대한다는 소를 올렸다. 당시 집현전 우두머리가 부제학 최만리였다. 세종은 32년 동안 집현전에 대제학을 임명하지 아니했다. 임금 일을 방해만 하는 집현전에 대제학을 두면 세종 자신이 고통을 받기에 비워둔 것이었다. 정인지는 집현전에서 일한 일도, 집현전 대제학을 한 일도 없었다. 임금은 찬성하는 선비가 하나도 없는 조선글자(훈민정음)를 만들어 내었다.

집현전 학사 일곱이 조선글자를 반대한다는 소를 올렸다.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불렀지만 악을 쓰면서 달려들기에 의금부에 하옥시킨 일도 있다. 나중에 세종이 승하하자, 신하들이 ‘세상 세(世)’로 묘호를 삼았다. 평가를 거부하는 글자였다. 이 점에서 세종은 외로웠고, 그렇게 대접을 받았다.

선조임금 때 동고 이준경이 선비였다. 패거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유서로 써놓고 “내가 죽거든 승정원에 넣어서 전하가 보시도록 하라”고 했다. 이 글을 사람들이 <동고유소>(東皐遺疏)라고 했다. 이 글을 율곡(이 이)이 악을 써서 배척했다. “이준경의 말이 여우 쥐새끼 같은 말입니다”라는 글을 지어 임금 선조에게 올린 사람이 그였다. 여기에서 율곡은 패거리하는 우두머리로 되었다.

서애 유성룡은 패거리를 하지 않는 선비였다. “서애가 없었으면 이순신은 없었다”라는 말이 정확하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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