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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장편 <바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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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은미희(45)씨의 시선은 흔히 가엾고 쓸쓸한 사람들에게로 가 머문다. 남루한 여인숙에 서식하는 군상을 포착한 장편 <비둘기집 사람들>에서나, 소수(小數)이자 소수(素數)의 힘겨운 사랑을 탐색한 <소수의 사랑>에서나 그의 주인공들은 삶이라는 이름의 절벽 앞에 외롭고 막막하니 서 있곤 했다. 그들을 하릴없이 세상에 내보낼 적에 작가 은씨의 그 커다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툭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이슬 한 방울쯤 매달려 있음직했다.
뒤늦은 후회도 찬연하지 않던가
새 장편 <바람의 노래>(문이당)에서 은씨에게 ‘채집’된 이들은 떠돌이 품바 사당패 사람들이다. 유랑을 천형으로 여기며 이 지방 저 도시를 순회하는 ‘잡 패밀리’ 일곱 남녀. 한수산씨의 출세작 <부초>를 떠오르게 하는 구도 속에 은씨 특유의 뚝심과 정공법이 빛나는 작품이다.
<바람의 노래>에서 ‘바람’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떠돌이 유랑패의 운명을 상징한다. 정처 없고 기약 없으며 질정 없고 내력 없는, 형체도 방향도 갈피도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없고 또 없는 대로 다만 가고 또 갈 따름인, 마치 동사 ‘가다’의 주어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길 위의 존재들.
“가는 거다. 그곳이 어디가 됐든. 그 끝이 어디든, 가보는 거다. 가고 나서 후회해도 늦지는 않다. 때론 뒤늦은 후회도 아름답고 찬연하지 않던가. 가보지 않으면 끝내 알 수 없는 것들. 그것들을 만나러 가는 거다.”(20쪽)
30년간 ‘동동구루무 북’을 메고 장터를 떠돈 ‘정도’가 밤길을 달리는 낡은 트럭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곱씹는 ‘가봄의 철학’이다. ‘그곳이 어디가 됐든’ 일단 가보는 막막한 행위가 수동적인 등 떠밀림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능동적인 ‘발견’을 향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것이 비록 구차한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떠돌이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기쁨과 보람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쌍장구쟁이 ‘태식’은 또 이렇게 풀어 놓는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들은 모른다. 그리고 세상이 요지경 속이라는 것도 알 리 없다.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세상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그들은 알려 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발가락 끝만 보고 걷는다. (…) 무릎이 꺾이고 당장에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을 때 그때, 길 위에서 죽으리라.”(125~6쪽)
이쯤 되면 단순한 자기위안을 넘어, 바보스러운 붙박이들을 향한 떠돌이들의 긍지와 자부의 선언이라 할 만하다. 얼핏 전도되어 보이는 이런 자부심의 근거가 ‘알려 하지 않는’ 그들에 비해 자신들은 ‘알려 하고,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있음은 물론이다. 제목의 ‘바람’이 그런 탐구와 모색의 결과 얻어진 답으로서의 인생의 여러 질감을 상징하게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품바 사당패 유랑 따라 벼랑의 삶 ‘구경’
어느 바람은 눈진하고 어느 바람은 숨막히고
어느 바람은 뒤까불고 곤고함 바람의 질감에 녹아
“어느 지방의 바람은 습해 터럭들이 눅진하게 몸에 붙고, 어느 지방의 바람은 부는 듯 안 부는 듯 잔잔한 그 한 자락에 초목의 비린내를 품어 오고, 어느 지방의 바람은 컥, 하고 숨이 막힐 듯한 사람 냄새를 실어 오며, 또 어느 곳의 바람은 애써 다독인 열망을 뒤까불어 놓으며, 또 어느 곳의 바람은 몸 안에 남아 있는 방랑기를 잠재웠다.”(27쪽)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곤고한 삶을 낭만적 모험담쯤으로 회칠해서는 곤란하다. 가령 이들은 그나마 형편이 좋을 때 여관에서 잠을 청하는데, “그(=여관) 안에서 하룻밤을 빌린 사람들은 낡은 방보다 더 신산하고 지난한 자신들의 삶을 부려 놓고는 꿈도 없는 잠을”(135쪽) 이루는 것이다. 아니, 꿈이 아예 없지는 않다. 나이트클럽 민요가수에서 떨려나 사당패에 합류한 ‘애자’가 꾸었다가 깨어나는 꿈인즉 대체로 이런 식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층집의 널따란 안방에 앉아 왁스 묻혀 가며 오색 영롱한 산수화 문양의 자개농을 닦고 있었는데 보이는 것은 여관 방이었다.”(147쪽)
나이트클럽과 자개농을 선망하는 애자에게 떠돌이의 보람 운운은 한마디로 ‘개똥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여자가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와 꾸리는 단란한 가정. 그러나 남자는 빈 약속의 대가로 그의 알량한 저축을 알겨먹고는 감감무소식이다.
꿈에 자개농을 닦고 있었는데…
“이젠 정말 장돌뱅이는 지긋지긋하다. 봄, 수선스러운 햇빛과, 한여름,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땡볕과, 가을, 청량한 햇빛에 애자는 미라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병신춤을 추고, 장구 장단을 두들기고, 소고를 들고 되지도 않은 춤을 출 때는 여자의 자존심 따위는 잊어야 했다. 그래도 손에 쥐는 것은 변변치 않았다.”(175쪽)
늦은 저녁에 도착했던 도시를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284쪽)으로, 역시 늦은 저녁에 떠나기까지의 며칠을 다룬 소설은 주인공 패거리가 서서히 파국을 향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무대 조명을 설치하던 태식이 떨어져 팔을 다치는 사고는 그들이 이 도시에서 겪을 일들에 대한 불길한 조짐과도 같다. 스물여섯 살 막내 ‘유석’은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한 뒤 마음을 잡지 못하고, 사당패의 우두머리 격인 ‘동현’에게는 왕년에 그가 몸 담았던 깡패 조직의 후배가 찾아와 조직 복귀를 요구하다가 무대와 악기에 불을 지른다. 태식이 거느린 두 여자 중 후처 격인 곱사등이 ‘선화’가 아이를 가진 뒤 소박맞은 ‘순미’는 유석에게 몸과 마음을 주었다가 그 사랑마저 여의치 않자 스스로 삶을 접는다. 결국 유석은 나이트클럽에 취직하고 태식은 선화와 함께 독립함으로써 팀은 해체된다.
아니, 해체된 것이 아니라 정도와 동현과 애자 세 사람으로 축소된 채로라도 팀은 의연하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한 그들은 아직 살아 있다.
“가다 보면 뭔가 길이 보일지 모른다. 예서 주저앉으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끄덕끄덕 걷다 보면 어느새 삶은 목적지에 다다라 있을지도 모른다. 한숨만 내쉬며 팔짱을 낀 채 마음만 다그치고 있을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278쪽)
게다가 소설은 오쟁이진 남자 정도와 배신당한 여자 애자의 결합 가능성이라는 반뼘쯤의 희망을 향해 열려 있지 않겠나. 다음은 소설의 마지막 두 문장이다. 비록 자개농은 아니더라도 애자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래도 곁에 남은 식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애자는 이들로 인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285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은미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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