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5
전투가 시작됐다.
치열한 전투는 왕복 2차선, 편도 1차선 길에서 벌어졌다.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리치몬드(Richmond)까지 가는 루트 5번. 1780년대 미 독립전쟁과 특히 1860년대 남북전쟁의 피어린 전투를 기리는 사적 표지판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리치몬드는 남북 전쟁 당시 남부동맹의 수도. 북부군은 바로 이 길을 따라 올라갔으나 리치몬드 문턱에서 로버트 리 (Robert Lee)장군에 패배했다. 그러나 나중에 리치몬드를 내주면서 남부군은 급격히 몰락했다.
나는 전면전을 꾀하지 않았다. 혁명 동지들은 다 어디 갔는지 혼자서 전투를 벌여야 했기 때문에 비정규전을 펼쳤다. 길의 양쪽 끝을 표시한 백색 선을 따라 진격했다. 길 안쪽으로 가다간 압제의 무리들이 언제 뒤에서 덮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릴라가 출현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긴급 출동한 것처럼 그들은 뒤에서 나타나 쇠를 그라인더로 가는 것 같은 날카로운 굉음을 내면서 내 옆을 스쳐갔다.
소형 트럭을 탄 어떤 녀석은 고속으로 질주하면서 내게 고함을 지르고 갔다. 내 영어가 안 좋길 다행이라는 생각이지만 최소한 'away'라는 단어 하나는 알아들었다. 꺼지라는 뜻이다. 공공의 소유인 도로가 마치 그들의 전유물로 착각하는 무리들이다.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이고 가는 녀석도 있다. 어떤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은 나를 앞질러 간 뒤 내가 밟고 가는 그 백색 선을 스윽 긁고 갔다. 이렇게 치일 수가 있다는 경고였다.
항상 그렇듯 압제의 무리들 가운데서도 대다수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내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반대차선으로 크게 우회해서 가는 운전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가다간 앞에서 오는 차가 부딪힐 수도 있을 텐데 되레 내가 걱정이다. 물론 이상적인 상황은 자전거를 지나갈 때 부딪혀도 안 아플 만큼 속도를 줄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악질적인 분자들이 뒤쫓고 있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라도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그 속도가 이 사회의 질서다.
멈춰 있을 땐 선량한 시민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릴 때 옆을 돌아보면 운전자들이 짐수레를 끌고 서 있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다. 냉소가 아니라 우의가 느껴지는 웃음이다. 생각해보면 멈춰 있는 차들이 내게 뭐라고 소리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멈추면 그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돌아간다.
길은 요크 강과 제임스 강을 차례로 끼고 달리다 하늘 높이 자란 숲 속을 뚫고 간다. 하지만 경치의 정취를 느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전투 초반이라서 그런 지 뒤에서 차가 오는 것을 느끼면 위축돼서 자전거가 자연 길 바깥 쪽으로 향하게 된다. 길 바깥은 보통 도랑이거나 풀밭이어서 내겐 벼랑과 같다. 그래서 방향을 교정하기 위해 왼쪽으로 핸들을 틀다가 길 안쪽으로 쑥 들어가게 되고 뒤에서 오는 차에 받힐 위험이 커진다. 어떤 상황이라도 내 갈 길만 똑바로 가면 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비단, 길이 아니라도 상황에 휘둘려 이상한 방향으로 새는 사람들을 봐 왔다.
화물차는 저쪽 진영에는 독일 전차와 같은 최대의 병기다. 화물차가 한번 지나가면 천둥 같은 굉음도 굉음이지만 후폭풍에 자전거가 크게 흔들린다. 맞은 편에서 화물차가 지나쳐도 자전거가 빨려들 것 같다. 몸집이 커서 백색 선까지 가득 차지하고 길을 훑어나가기 때문에 다른 세력들을 일거에 소탕해 버린다.
제임스타운서 리치먼드로 가는 루트 5번
질주하던 어떤 녀석이 “꺼져” 고함을 지른다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이거나
길가 백색선을 긁고가며 위협하는 녀석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가 올라가는데 누가 손에 피 묻히고 싶겠는가. 화물차들도 위협만 하고 실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위협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치명적인 상황은 발생한다. 앞과 뒤에서 오는 화물차 두 대가 하필이면 내가 달리는 그 지점에서 마주치는 순간이다. 편도 1차선이어서 어느 화물차도 물러날 공간이 없기 때문에 거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친다. 내 핸들이 만약 조금이라도 더 흔들렸으면…
그 다음 위험한 상황은 차 두 대가 연속으로 지나갈 때다. 먼저 달려오는 차의 굉음에 가려 뒤차가 오는 걸 놓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일년에 1만5천명이 자전거를 타다 목숨을 잃으며 6만 명이 부상을 입는다. 모두가 혁명 동지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적지 않은 수가 길에서 산화한다. 사고원인의 96 퍼센트가 바로 자동차와의 충돌이다.
화물차가 아니더라도 루트 5번의 길가를 달리는 것은 쉽지 않다. 간첩의 침투를 막기 위해 철조망에 깨진 병 조각들을 달아놓는 것처럼 버드 라이트 맥주 병 깨진 조각들이 즐비하다. 요크타운에서 출발을 도와준 브라이언 페트리치는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하다가 운전자들이 던진 맥주병에 맞은 적도 있다니까 깨진 병 조각들을 피해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느림보 거북이의 비애
도로 잔혹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람쥐, 살쾡이, 토끼, 누런 뱀, 검은 뱀, 또 그 시체들을 파먹다 똑 같은 운명이 된 독수리의 시체들이 시뻘건 내장들을 토해놓고 누워있다. 마치 동물원을 난입해 도륙을 한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시체들을 던지고 간 듯하다. 나중에 다른 길을 가다가 바둑판만한 거북이가 등이 터져 죽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왠지 더욱 비감했다. 토끼는 잘만 하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거북이의 걸음으로는…. 사슴의 시체는 심각한 도전이다. 그것을 피해나가기 위해서는 도로의 안쪽으로 깊숙이 돌아가야 한다.
만약 내가 철로를 달리는데(그럴 기술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기차가 다가와서 비키라고 했으면 주저 않고 비켰을 것이다. 기차에 치이면 무지 아프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철도회사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철도를 건설했다. 그러니 기차 전용이 맞다. 만약 자동차회사들도 도로 포장비용을 부담, 또는 분담이라도 해야 했다면 이렇게 많은 자동차들이 설치고 다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이슈다. 왜 미국에서 납세자들의 돈으로 도로를 포장해주고 자동차회사들에게 더 많은 차들을 팔게 해줬는지 늦었지만 청문회라도 열어야 한다. 그렇게 공짜로 길을 닦아주니까 자동차들은 이게 자기 것인 줄 착각하고 도로를 점령해버렸다.
청정한 수단인 자전거는 소똥과 말똥의 악취에서 길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자동차의 매연은 소말똥을 능가한다
서울도 그랬듯이 미국의 도심에는 전차가 다녔다. 안전하면서 편리했다. 이 전차가 자연스런 도태과정을 밟아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0년대 말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는 다른 자동차회사들과 담합, 전차회사들을 몰래 매입한 뒤 전차의 궤도를 걷어내버리고 버스회사로 바꿔버렸다. 버스를 더 많이 팔기 위해서였다. 담합행위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는데 제너럴 모터스 간부에게 벌금형 그것도 단 돈 50달러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그렇게 해서 전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최근 휴스턴과 뉴올리안스를 비롯, 몇몇 도시에서는 전차를 복원했다. 도심 교통 수단으로 전차만큼 많은 사람을 나르면서 안전한 게 없다.
자동차는 사람을 사물화한다
자동차의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도, 그리고 비행기의 아버지로 불리는 라이트 형제도 모두 자전거 기술자였다. 근본적으로 자동차나 항공기 그리고 자전거도 원리는 같다. 수레바퀴다. 뭔가를 돌려서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는 말과 소를 수레바퀴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길을 소똥과 말똥의 악취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인도적이고 청정한 수단이다. 자동차는 소말똥을 능가하는 매연을 배출한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상하게 수레를 이용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족은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수레를 사용했는데도 말이다. 잉카제국도, 마야문명도 수레 없이 건설됐다. 말도 없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 수레와 말이 있었다면 유럽 개척자들의 식민지 건설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피사로가 13명을 이끌고 잉카제국을 작살낼 때 또 코르테즈가 마야 문명을 쳐부술 때 총도 총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무력은 말이 제공한 높이와 기동성이었다.
무엇보다 자동차는 공존의 문화를 파괴한다. 자동차가 발달한 미국에서처럼 공공성이 공산주의처럼 죄악시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공공의 교통 수단인 철도는 이미 천덕꾸러기로 전락한지 오래다. 올해 미 정부는 철도회사인 암트랙(Amtrak)에 대한 예산지원을 중단키로 했다. 암트랙이 재정적으로 회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전에는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 기차가 장사가 안되도록 정책을 펴놓고 이제 와서…
거기에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조차 수지를 맞추기 위해 노선을 대폭 감축, 승객이 적은 마을들은 고립되고 있다. 미국에는 보도조차 사라지고 있다. 오로지 자동차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로 완성됐다.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가가 됐다. 세계 인구의 5%도 안 되는 미국인들은 전 세계 일일 석유 소비량의 25%나 쓴다.
에너지의 낭비와 공해 외에도 자동차는 사람을 사물화한다. 자동차에 올라타면 사람들은 자동차가 된다. 옆으로 지나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나서 보니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식이다.
버스나 기차에 올라탔을 때 승객들이 공유하는 연대감,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함께 하면서 형성되는 동지의식 이런 것 대신 자동차는 개인적 안락함을 추구한다. 자동차를 타고 교외로 탈출하면서 미국인들은 광활한 미 국토를 남용하고 있다. 꼭 모양이 나쁜 것만 난개발이 아니다. 루트 5번에서 루트 6번 그리고 중앙선도 안 그려진 후미진 길을 타고 애팔래치언 산맥으로 올라가도 끝없이 집들이 이어진다. 우리 형편에는 부러운, 넓은 잔디밭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단독 양옥들의 연속이지만 이런 미국식 소비 양식이 이라크 전쟁을 비롯,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가면 숲이 나오겠지 하면서 오줌을 참아야 하는 고통이 계속된다. 남의 집 앞에서 볼일을 볼 수 없지 않은가. 이 넓은 땅에 이런 아이러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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