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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16:16 수정 : 2005.06.23 16:16

1987년 6월29일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6.29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이로써 그해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래 ‘4·13 호헌조처’, 5.18 천주교 사제단의 박종철치사사건 진상조작 성명 발표, 5.26 전면 개각, 5.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6.9 연세대생 이한열 시위도중 최루탄 파편 피격, 6.10 잠실체육관서 여당 대통령후보에 노태우 선출, 같은 날 전국적 반정부 저항운동인 6월항쟁 시작, 6.18 전국 도시들에서 150만명 최루탄 추방 거리시위, 6.26 180만명 국민평화대행진 참여 등으로 숨막힐듯 고조되던 시국 초긴장은 일거에 돌파구를 찾았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기 드문 ‘민중의 승리’였으나 군사정권 퇴진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6월10일 이후 17일 동안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일반시민, 특히 중산층의 광범위한 가담으로 ‘민심이반’을 재확인한 전국의 시위는 총 2145회에 이르렀고 발사된 최루탄만 35만발을 헤아렸다.

전두환은 애초 비상계엄 선포로 시민저항에 정면대응하려 했으나 정권내부의 일부 우려와 위기를 감지한 미국쪽 반대로 한발 물러서서, 정치공작을 통한 권력연장(노태우 정권 승계)이라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하기로 전술을 바꿨다. 6.29선언은 그들의 항복선언이자 한편으로는 항복을 가장한 권력연장 음모이기도 했던 것이다. 음모는 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야당과 저항세력의 분열 덕에 기막히게 먹혀들어갔고 그로 인한 절망과 후유증은 오래 남았다. 88년 5월 <한겨레>의 탄생은 그 절망속에 핀 희망의 꽃이었다.

6월 하순엔 나라 안팎에서 큰일이 많이 일어났다. 48년 6월24일엔 소련의 베를린 봉쇄, 49년 6월26일엔 이승만 정권이 개입한 정황이 뚜렷한 백범 김구 암살사건, 그리고 50년 6월25일엔 통한의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앞서 14년 6월28일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 비밀결사 대원이 쏜 총에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가 쓰러져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으며, 44년 6월29일 만해 한용운이 입적했고 95년 이날에는 삼풍 백화점이 거짓처럼 무너졌다. 48년 6월30일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일컫는 트랜지스터 개발 사실이 미국 벨연구소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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