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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16:33 수정 : 2005.06.23 16:33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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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은 전쟁. 여전히 세계 최대규모의 무장병력이 직접 대치한 가운데 최강대국들이 모조리 개입하고 있는 기묘한 전쟁. 지금도 7천만의 인생을 그늘지게 하고 있는 한국전쟁은 아직껏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숱한 의문들을 간직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인해전술은 정말 중국군의 기본전술이었나?

2.왜 38도선 이남에 있는 개성이 북한 영토가 됐나?

3.전쟁의 유일한 승자는 일본이라는데?

4.설사 북한정권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흡수통합론자들 생각과는 달리 남한에겐 북한지역 통제권이 없다는데?

5.북한군은 전쟁 초기 왜 서울에서 3일이나 머뭇거리며 속전속결의 결정타를 날리는데 실패했나?

이밖에도 북침인가 남침인가, 왜 하필 6월25일 발발했나,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이냐 실패냐, 미국은 왜 전쟁중에 2번이나 이승만 제거계획을 세웠나, 전선이 거의 고정되고 나서도 왜 2년이나 더 전투가 지속됐나,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됐나, 미군은 진짜 세균전을 감행했나 등 단골 의혹메뉴들도 많다.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의 편견?

한때 이 전쟁의 명칭으로 통용됐던 6.25를 바로 앞두고 출간된 <한국전쟁>이란 책이 ‘대체로 학계에선 알려져 있는’ 이들 의문들을 다시 떠올렸다. 출판사가 ‘국내 역사학자가 쓴,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 지향의 첫 한국전쟁사’로 자리매김한 이 책의 지은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제시한 몇가지 의문들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인해전술은 없었다. 1950년 11월 미군 등 유엔군 2만명이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중국군 12만명과 맞닥뜨렸 고, 중국군 4만여명 유엔군 2500여명이 전사했다. 살아남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굳세어라 금순아)를 폭파하고 떠난 당시 미군들은 나중에 ‘중국군들이 끊임없이 밀려왔으며, 중국군의 시체로 진지를 구축했다’고 증언했고 ‘인해전술’이란 거기서 나온 말이다. 당시 중국군의 전투행태는 특수한 상황에서 구사된 것으로 중국군의 일반적인 전술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들은 밤에 산을 타고 진군하다 급습하는 게릴라전술을 주로 썼다. ‘인해전술’이란 말에는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2. 51년 10월 중순, 정전협상 회담장소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바뀌었다. 원래 38도선 이남지역이었던 개성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판문점을 중심으로 휴전선을 긋는 과정에서 판문점 북쪽에 있던 개성이 자연스레 북한의 영토가 됐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제대로 싸우지 않아 휴전선이 개성 아래로 내려왔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니다.

인해전술은 과연 중국군의 기본전술?
38도선 이남 개성이 왜 북으로?
유일한 승자는 일본?
6월이면 되새김질하는 단골 물음표들
비극의 책임, 외부에만 돌리는건 아닌가

한국 헌법규정 바깥에선 ‘먹통’

3.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지만 최대의 수혜자를 따져본다면 바로 일본이다. 오늘날 일본 번영의 토대가 된 전후 고도성장의 전기가 된 것이 당시 전쟁특수였다. 뿐만 아니라 다시 미국 안보전략의 핵심축으로 부상한 일본은 자위대를 만들어 재무장의 길로 나섰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9월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배상 및 영토와 관련된 문제들을 자국에 유리하게 처리함으로써 2차대전 전쟁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챙겼고, 독도 영유권논란 개입 틈새도 만들어냈다.

4. 국군과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했을 때 이승만은 그곳 이북 5도 지사들을 임명했으나 유엔사령관은 자기 권한이라며 그들을 해임해버렸다. 제3차 유엔 총회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 제3항은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 및 협의할 수 있었던 한국지역에 효과적 지배권을 가진 합법정부’로 돼 있다. 말하자면 남한지역 통제권만 갖는다는 얘기고,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한국 헌법 규정은 바깥에선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향후 북한지역에 변고가 생길 경우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빚어질 가능성이 짙다.

5. 북한군이 왜 서울에서 사흘이나 머물며 속전속결 찬스를 날려버렸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다만 애초 서울일대만 점령해서 남한 정부 요인들을 붙잡고 판세를 굳힐 생각이었다는 ‘제한전쟁설’도 있고, 중부전선 춘천지역 전투에서 남한군 제6사단의 예상외의 저항에 막혀 사흘간 진격을 저지당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는 분석이 있다.

지은이는 그리고 분단과 전쟁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외부에서만 구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우리 자신에게 문제는 없었던가를 물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조지 케난에 대해. 지은이는 미국 정부가 전후 소련 봉쇄정책을 본격화할 때 주무부서 중 하나였던 국무부 핵심 요직 정책기획국장 창설자자인 케난은 그 자리서 물러났고 대소 강경정책 및 미국내 빨갱이 사냥식 반공무드 확산의 기획자는 그의 후임 폴 니츠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케난에 대해 ‘군산복합체에 이용당했다’는 얘기, 그가 의도한 봉쇄는 정치적, 경제·심리적인 것이지 군사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들이 있지만, 그가 어쨌든 ‘냉전의 설계자’였으며, 1948년 3월1일 맥아더 장군을 만나러 방일했을 때 이미 전후 일본을 반공보루로 강화하는 이른바 ‘역류(역코스)’정책을 갖고 갔고, 그의 온건 봉쇄정책이란 것도 결국 미국의 패권적 질서 확립에 그것이 강경대결책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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