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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 향원 |
선비 밑에 학자가, 학자 밑에 ‘향원’(鄕原)이 있다. 학자는 땅에서 사람을 보기에 선비처럼 초연하지 못하다. 학자는 패거리에도 초연하지 못하다. 학자에는 큰 학자와 작은 학자가 있다.
글을 짓는 사람이라고 다 학자는 아니다. 겨레의 고통을 풀어주는 이가 큰 학자요, 고을·마을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이가 작은 학자로 된다.
뒷사람들한테 읽히지 아니하고, 책이름만 남아서 퀴즈문제로 나오게 되면, 학자로 되지 아니한다. 다산 정약용이 <아언각비>를 지었다. 혹 배달말로 된 물고기·풀 이름들을 기록했더라면, 그는 작은 학자로 될 수 있었으나, 배달글자를 쓴 바가 없다. <목민심서>도 지었는데, 목민관들이 기생을 조심하라는 내용은 있되 뇌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광복 후, 다산은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책을 읽지도 아니한 교수자가 <목민심서>를 좋은 책이라고 한다. 다산의 글을 번역해 봤자, 읽힐 글이 많지 않다.
공자가 말하기를 “향원은 덕을 도둑질하는 놈”이라고 했다. 이 ‘향원’을 맹자는 ‘사이비’(似而非)라고 했다. 맹자 뒤에는 ‘향원’을 말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논어>를 읽은 사람들이 ‘향원’에 이르러서 무릎을 친 사람이 차이나 본토에서는 맹자뿐이었다. 공자말이 너무 부드럽다며 ‘사이비’라고 풀었다. 배달겨레 가운데 송학 주 희(주자)를 ‘향원’이라고 말한 선비가 노석 려연구였다.
임금(효종)이 숨진 뒤 계모가 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를 두고 다퉜던 벼슬아치 우두머리가 ‘송시열’과 ‘허 목’이었다. 두루 ‘주 희’를 끌어다 벌이는 패거리 싸움질이었다. 이들이 나라를 해롭게 했던 그 ‘향원’이었다.
광복 뒤 이승만이 세 번이나 대통령을 하자니 헌법을 고쳐야 했다. 찬성 136표를 얻어야 하는데 1표가 모자랐다. 국회부의장 최순주가 “개헌안이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고 했다. 당시 서울대 한 수학 교수자가 경무대로 이승만을 찾아가 ‘꾀’를 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사사오입 똥교수’라 불렀다. 향원을 달리 바꾸면 ‘똥학자’가 된다. 똥학자는 나라와 겨레를 해롭게 한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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