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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17:32 수정 : 2005.06.23 17:32

19세기 조선, 생활과 사유의 변화를 엿본다

19세기 조선은 서구 과학지식이 유입되어 전통적인 지식과 갈등하고 섞이며 근대를 준비하던 때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당연히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 당시의 저작에는 시대의 조각과 사람들의 인식 풍습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지 않겠는가.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1788~1856)의 저작. 할아버지 이덕무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장서를 바탕으로 당시의 각종 현상을 1417항목으로 나눠 문헌과 관찰·체험를 토대로 기술한 백과사전. 200여년이 흐른 지금 그 책은 일종의 민속지로 성격이 바뀌게 된 것. 주영하·김소현·김호·정창권 등 소장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 9개월의 공동연구 결과물로 <19세기 조선, 생활과 사유의 변화를 엿본다>를 내놨다.

이규경의 인식과 그 변화가 두드러진 분야는 세시풍속과 의학·신체관. 세시풍속에서 가장 보수적인 인식을 드러낸다면 의학·신체관은 서구 과학지식이 들어와 근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설명하는 세시풍속의 기본텍스트는 청 서세부의 저술 <하소정해>. 그 저본인 <하소정>은 12개 월별로 성상, 기후에 따른 농업의 변화를 기술한 책. 역법과 월령은 농민생활에 도움을 주지만 본디 왕의 지배를 위한 것이라는 게 이규경의 시각. 명천시수민사(明天時授民事), 즉 왕의 지배가 천명에 따른 것이라는 논리에 닿아 있다. 그가 중국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 지식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왕도정치에 대한 도전의식이나 근대국가로의 희구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부문이다.

그러나 개자추가 불에 타죽은 날이 5월5일인데 3월3일로 와전되었다면서 한식은 그를 애도하여 만들어진 게 아니라 건조한 봄 화재를 막기 위해 생겨난 풍속이라는 주장, 부처를 공양하는 날인 백중이 민간에서는 두레를 계산하면서 호미를 씻고 음식을 마련해 즐기며 노는 풍습으로 변형되었다면서 현실변화에 착목한 것 등에서 실사구시적인 면모를 보인다.

의학·신체관은 전통과 새로운 지식이 뒤섞여 나타나는 분야.

남자가 먼저 흥분하면 남자아이가, 그 반대면 여자아이가 잉태한다는 얘기, 남자는 얼굴에 양기가 모여 엎드려 출생하고 엎드려 죽는 반면, 여자는 음기가 등에 모여 그 반대라는 얘기 등은 전근대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신체의 중심은 근골”인식 전환

사철에 맞춘 양생론은 그런 것의 대표. 여름철 섭생법을 보자. “새벽에 일어나 마름과 연잎을 오려 옷을 만들고, 꽃나무 옆에 앉아 이슬을 마신다. 사시에 도화와 법첩을 감상하다가 못가에 나가 구경한다. 정오에 두건을 벗어 석벽에 걸고 평상에 앉아서 산해경을 이야기하다가 피로하면 좌궁침을 베고 낮잠을 잔다. 오후에 연꽃을 빚은 술을 마시고 저녁 무렵 주사온천에 목욕하고 이어서 조각배를 타고 낚싯대를 드리운다.” 고루거각 양반이나 가능한 일이다. 성경험이 없는 동녀를 이용해 늙은 기를 보충하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몹시 부러워하는 대목은 또 뭔가.

19세기 조선 생활문화 담은
‘백과사전’격 이규경 저작 연구
서구 과학지식 들어오던 시기
세시풍속·의학·신체관등 변화 살펴

%%990002%% 그는 인위적으로 색욕은 막을 수 없다면서 과부의 재가를 허용해야 한다든가, 예방법의 도입에 큰 관심을 두어 종두법, 우두법을 소개하는 인식의 변환을 보여준다.

가장 큰 인식의 전환은 신체의 중심을 근골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패션, 체육, 훈련 등이 신체를 보는 관점에 포함되고 육체 수양을 중시하는 근대적인 인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양반 부인 가운데 아이를 잘 낳는 여자가 드물고 노비 가운데 아이를 못 낳는 부인이 드문 이유를 노비들이 평소에 몸을 많이 움직여 근골이 부드럽고 건강하기 때문임을 논증한다.

친자 여부를 확인하려면 피를 합쳐 섞이면 친자 그렇지 않으면 남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 무렵 친자 여부가 중요하게 된 사회상황 반영한다. 회충 구제에 망건가룻물, 난산 때 사모 삶은 물, 급사 위기때 다른 사람 입던 옷의 땟국을 마신다는 풍습의 기록은 보너스.

이규경의 특장 중 하나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하찮게 여긴 복식에 눈길을 준 것. 그것도 관념적이 아니라 시시콜콜 관찰하여 기록하여 100년 전 의복을 복원하는 실마리가 될 정도다. 의복의 소재, 쓰개류 및 머리모양, 의복, 상례복 등 등. 특히 각각의 의복, 옷의 구성부위의 명칭과 바느질 방법 및 도구의 명칭 등 한자어를 한글로 설명해 놓아 당시에 사용된 명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비천한 자는 아무리 추워도 방한모 휘항을 존귀한 자 앞에서 쓸 수 없었다. △남성은 관모로, 여성은 머리 장식과 머리모양으로 신분을 구별한다. △혼례 때의 머리장식인 어여마니가 본디 왕후가 쓰던 것이다. △사대부 부녀 귀에 거는 귀걸이, 여염집 여인과 천녀는 귀를 뚫어 귀걸이를 했다. △남자들도 귀걸이를 했는데 선조때 이후에 그 풍습이 사라졌다는 등의 얘기는 재미있다.

장애인도 살기 좋았던 시절

시각 장애인의 삶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식을 분석한 권말의 논문은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시각 장애인을 자립 가능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직업을 갖고 자립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관상감이나 관습도감에 이들만을 위한 관직을 설치하여 벼슬과 녹봉을 주었다. 그들은 점복 독경 관현악 연주 등 다양한 직업으로 사회활동을 했으며 일부는 권위자로 이름을 떨쳤다. 시각 장애인들은 장애에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았으며 사회에서도 이를 특별히 경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기 이후 유학자들이 장애인들의 역할을 배척하면서 후기로 갈수록 그들의 지위가 하락하고 20세기 중반 이후 산업화와 함께 거리로 내몰렸다는 거다.

이 책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1417항목 가운데 겨우 40개를 훑었을 따름. 워낙 방대한 양인데다 초서로 되어 있어 국역작업조차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시작한 상황이다. 자신들의 작업은 빙산일각이라며 원저 교감을 포함해 전문가가 붙어야 본격 연구가 가능하다는 게 저자 가운데 한사람인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말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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