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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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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에밀’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읽던
게임보다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
자기주도적 학습과 인성교육 등
대안 모델로 큰 영향끼쳐
문명 혐오하던 루소 방식이
경쟁력중시 엘리트교육으로 왜곡
칸트는 날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로 산책을 했다. 동네 사람들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을 정도로 칸트의 일상은 어김없었다. 그러던 그가 딱 한 번 산책을 거른 적이 있단다.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그만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또한 자신의 진중(陣中) 문고에 <에밀>을 꼭 챙겨 다녔다고 한다.
<에밀>은 우리말 번역으로도 500쪽을 가뿐히 넘는 대작이다. 거기다 이 책에는 ‘교육의 고전’이라는 묵직한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 때문에 책을 열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읽기 시작하면 굳이 칸트나 나폴레옹을 들먹이지 않아도 왜 두껍고 묵직한 내용의 이 책이 지난 수백년간 사람들을 매료시켰는지 독자 스스로 깨닫게 될 터이다.
<에밀>은 사상서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1990년대 중후반, 소녀의 성장을 다룬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 평범한 소녀를 잘 키워 공주를 만드는 게 게임의 목표였다. <에밀>은 이 게임의 ‘원류’라 보아도 좋을 듯싶다. 루소는 에밀이라는 ‘부유하고 건강상태가 아주 좋은 사내아이’를 가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교육환경 속에서 20년에 걸쳐 에밀을 건강하고 자유로운 시민으로 키워낸다. 물론 소설이라는 형식의 시뮬레이션으로 말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하다.”
<에밀>은 게임 같은 재미가 있는 소설이지만 동시에 지적 부담이 큰 사상서이기도 하다. 교육은 항상 이룩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을 규정하고 출발한다. 이 점은 교육성장소설인 <에밀>에서도 마찬가지다. 에밀을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먼저 루소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 즉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하지만 오직 제도를 통해서만 악해진다”고 말한다. <에밀>에 나오는 예로 이 말을 풀어보자. 아이가 호들갑스럽게 놀다가 집안의 온갖 장식거리들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경우 아이의 행동은 나쁜 것인가? 아니다. 어린아이는 천성적으로 활달하게 움직이며 장난을 치게 되어 있다. 오히려 잘못은 별 효용도 없으면서 쉽게 망가질 수 있는 물건을 여기저기 배열해 놓았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이 자연상태에서는 허물이 될 수 없는 일들이 문명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의해 비로소 잘못된 행동으로 규정되곤 한다.
나아가, 우리의 욕망 중 상당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목공도구보다는 실용적 가치란 거의 없는 보석을 더 소중히 여긴다. 문명이 보석을 귀하게 가치매김하고 있기에 그렇다. 우리는 자연상태에서라면 겪지 않을 거짓 욕망에 시달리고 이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따라서 루소는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의 소박한 생활만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에밀의 교육과정 또한 자연이 인간에게 심어준 욕구를 왜곡 없이 건전하게 키우고 충족시켜주려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에밀은 전원농가에서 양육된다. 도시의 온갖 해로운 병패에 물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그의 선생은 루소 한 사람뿐이다. 루소는 교육에서 체벌과 훈계를 엄격하게 금한다. 어른의 논리로 나무라보아야 아이는 그 꾸지람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선생의 역할은 가르침에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자기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고 판단력을 형성해 가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화가 나서 창문을 깨뜨렸다고 하자. 이럴 때 체벌을 하거나 도덕에 기대어 비난한다면 아이의 영혼은 비뚤어질 뿐이다. 아이는 맞지 않으려면 굴종해야 한다는 비굴함만을 배울 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비난 또한 아이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강요일 뿐이다. 루소는 처벌하려 하지 말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라고 충고한다. 창문을 깨뜨렸다면 반성할 때까지 창문을 고쳐주지 마라. 깨진 창 사이로 찬바람이 씽씽 불어대는 속에서 지낸다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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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의 출간 이후 독실한 얀센주의자들의 분노와 파리대학 신학부의 고발로 국회에서 루소의 체포동의안과 발행금지령이 통과되자, 뤽상부르 원수의 저택으로 피신했다. 예술과역사박물관 소장 그림 ‘뤽상부르 원수 부인’(자캉 그림). <에밀>(한길사 펴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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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는 자연이 정해준 성장의 순서가 있다. <에밀>의 5부는 인간의 성장단계에 따른 교육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1부는 0~5살 육체 발육기를, 2부는 신체와 감각의 발달이 주로 일어나는 5~12살 시기를, 3부는 지능과 기술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12~15살을, 4부는 도덕심과 신앙이 무르익는 15~20살을, 마지막 5부는 스무 살에서 결혼까지 단계를 다룬다.
루소는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아이에게 어른이 되었을 때 필요한 기술이나 언어를 미리 주입하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루소는 15살 이전의 교육은 ‘소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단계에서는 ‘미덕이나 진리를 가르치기 보다는 마음과 정신을 악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려면 아이에게 역부족인 과제들을 강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느 누구에도 나쁜 일을 하지 않는 한’ 완전히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루소는 조기교육 대신 ‘지연교육’을 강하게 앞세우는 교육자라고 할 수 있겠다. 각 발달단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아이는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배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 대자연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이를 통해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게 자란 아이는 성숙이 진행되면 지적 호기심이 자연히 싹트게 되어 있다.
아울러 루소는 ‘시간을 낭비하라’고 권한다. 아이가 호기심을 키우며 시행착오와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기다리라는 뜻이다. 교육을 못 받는 것보다는 잘못 받는 게 더 해롭다.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주입식교육에 매달렸던 우리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서구의 학생들보다 오히려 떨어지는 지금의 결과를 보면 루소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에밀>과 현실 속의 에밀들”
사실, <에밀>의 이런 주장들은 우리에게 이미 새로운 게 아니다. 현대 용어로 하자면 그의 교육방식은 ‘학생 중심의 자기주도적 탐구학습과 인성교육’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에밀>은 서머힐을 비롯한 숱한 대안교육의 모델이 되어 왔다. 8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우리의 열린교육 운동도 루소의 교육이념과 멀지 않다. 공교육에서도 루소가 내세운 교육의 이상은 구현되어야 할 목표로 엄연히 현장에 스며들어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심한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연에 따라 교육받은 에밀은 ‘근면하고 인내할 줄 알며, 절제력이 있고 의연하며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현실의 에밀들은 어떤가? 루소의 교육이상이 주된 교육 패러다임으로 정착한 지금의 학생들은 18세기 루소가 한탄했던 사람들의 모습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이 점은 서양의 명문학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어지간한 사립학교 학생들은 <에밀>에서보다 더 섬세하게 배려된 환경 속에서 도덕심을 기르고 자기주도적이 되도록 교육받는다. 그렇다면 그네들은 과연 ‘건강하고 편견 없는 올바른 정신과 자유롭고 정념이 없는 마음’으로 학교문을 나서고 있는가?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일 것 같지 않다.
문제의 근원은 원래의 목표에 이미 숨어 있기 마련이다. <에밀>의 교육 목적은 건강한 자연인을 기르는 데 있다. 그러나 루소를 흉내낸 현대학교의 목표는 암암리에 ‘경쟁에서 이기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문명을 혐오하여 자연에 따른 양육을 꿈꿨던 루소의 교육방식은 부지불식 중에 문명사회에서 엘리트가 되기 위한 교육으로 왜곡되어 왔던 것이다.
소설 속의 에밀은 문명과 격리된 시골농장에서 자란다. 그러나 현대의 에밀들은 ‘대도시의 해로운 풍습’과 무관할 수 없는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사실 문명과 격리된 속에서 교사 한사람에게 전적으로 인도를 받는다는 에밀의 교육 설정은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에밀>은 루소 자신의 말처럼 ‘어느 환상가가 쓴 교육에 관한 몽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점이 <에밀>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때로 완벽한 환상은 냉철한 현실분석보다 더 큰 혜안을 준다. 교육현장 속에서는 항상 목적과 수단이 뒤엉키고 욕망과 이상이 헷갈리는 가운데 수많은 갈등과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에밀>은 교육이 원래 지향했던 ‘초심’을 확인시켜 주는 기준점으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50자 서평
◇ 서경률(39·연세대 의대 조교수)
“루소 자신이 다섯명의 자녀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로서 제대로 양육치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이 글을 쓰는 이유였다니 이 아픈 고백에 귀기울일만 하다(나도 이제부터 새로운 맘으로 첫째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둘째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 심승희(29·인천부평동초등학교 특수교사)
“취해야 할 것은 ‘자연’이 목적이고 ‘경험’이 도구인 교육. 시대착오적인 ‘현모양처형 여성 육성’의 함정만 살짝 비켜간다면 여전히 교육의 근간이 될만한 명저. 다만, 후반부의 졸음은 꾸~ㄱ 참을 것.^^”
◇ 김철권(인터넷서점 알라딘 ‘마이리뷰’에서)
“(1995년 겨울, 난 이등병이었다. 패치카를 때는 내무반 구석의 작은 책꽂이에 박혀 있는 <에밀>을 발견했다. 내무반 막내에게 책 읽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군장에 넣고 다니며 다 읽는 데 9개월 걸렸다) 에밀은 나에게 유용함을 주지 못했다. 누구든 에밀을 읽고 처세술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은 나에게 책 속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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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lwoo@hani.co.kr
서평자 추천도서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한길사 펴냄(2003), 3만5000원
(프랑스어 원전 완역, 상세한 각주와 역자 해제)
에밀
박호성 옮김
책세상 펴냄(2003), 4900원
(루소 교육론의 핵심 잘 정리, 1부만 번역)
에밀
정영하 옮김
연암사 펴냄(2003), 1만2000원
(간편한 편집, 읽기 쉬운 문투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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