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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19:55 수정 : 2005.06.23 19:55

남재일/ 문화평론가

생명은 전략이다. 무리짓기는 가장 흔한 전술이다. 사자는 사냥의 효율을 위해 집단을 구성하고 얼룩말은 자기 방어를 위해 떼를 짓는다. 한 치의 허영과 위선도 용납 않는 자연에서 고스톱 치기 위해 무리를 짓는 경우는 없다. 얼핏 아무 생각 없이 몰려다니는 전어들조차 떼의 사연이 있다.

전어는 수심 30m 이내 물 한 가운데에 몰려 산다. 덩치가 작아서 광어처럼 저 홀로 바닥에 배를 깔고 느긋하게 살 처지가 못 된다. 그렇다고 놀래미처럼 바위틈에 빌붙어서 해초처럼 위장하고 살 깜냥도 안 된다. 놀래미처럼 살려면 적이 사라지거나 먹이가 나타날 때까지 나 아닌 모습으로 버티는 인내심과 엉큼함이 필요하다. 전어는 가진 것도 없는 것이 성질은 지랄 맞아서 중원을 헤집고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포식자들의 시선 앞에 스스로를 던지며 ‘나 잡아봐라’고 까부는 생명체에 무슨 전략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게 바로 고도의 전술이다. 바로 눈앞에 차려진 밥상을 보고 일단 떼부터 덮친 포식자는 이 걸 먼저 먹을까 저 걸 먼저 먹을까 우왕좌왕하다 급기야 다 놓치게 된다니 말이다. 스타(star)와 왕(king)을 동시에 욕망하는 포식자의 심리를 이용해 포식자를 스타킹(starking)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어들의 대담한 심리전이 놀랍지 않은가.

전어들이 이 작전에 성공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포식자와 동일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게 필수적이다. 누구 하나 겁 많고 의심 많고 발 빠른 놈이 있으면 이 진용은 급속히 깨진다. 신뢰가 궁극적으로 나를 보호하는 최대의 생존전략이라는 종의 운명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세상에서는 그걸 ‘연대’라고 한다.

연대로 뭉친 떼는 아름답다. 그 어떤 개체도 집단 뒤로 숨지 않고 집단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신뢰와 사랑을 개인의 생존 전술로 확신하는 개체는 집단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환원해서 보고, 인간은 개인으로 홀로 설 때 비로소 진심으로 성찰하기 때문이다. 자연 속의 떼는 군더더기 없는 운명적 연대로 뭉쳐 있다.

하지만 더러 자연의 프로그램에도 바이러스가 먹는다. 생존과 무관하게 ‘욱’해서 떼를 짓는 종자들이 종종 있다. 펄벅의 ‘대지’에 나오던 메뚜기떼, ‘스웜’이란 영화에 나오던 ‘벌떼’, ‘타잔’시리즈에 나오던 개미떼 등등. 이들은 평소 핍박받던 약소한 생명체로 엄청난 사이즈로 무리를 이루어 닥치는 대로 휩쓸어 버린다. 평소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자 작심하고 모여든 이들에게 떼는 폭력성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옆으로 밀어 놓을 수 있는 방패다. 죄의식을 반납하니 폭력의 퍼포먼스는 점입가경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집단의 주인이 아니라 집단의 노예이기 때문에 어떤 운명적 연대도 못 느끼며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 사나운 노예근성은 언제나 서론만 요란한 법이다. 인간세상에서는 이런 떼를 ‘폭도’라 부른다.

‘욱’해서 떼짓는 종자들
나약한 먹이엔 뭇매를
강적에겐 열광적 숭배를
집단과 명분의 등 뒤에 살며
개인에게 독액 뿜는 바이러스
소통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폭도는 난폭하다. 그들이 멀리 내거는 명분이 정당할수록 눈앞의 행동은 더욱 난폭해 진다. 일단 폭도로 진입한 집단에서 명분은 폭력을 추동하는 자극제에 불과하다. 부모를 살해한 원수에게 복수하는 무협영화 주인공의 폭력에 우리는 얼마나 감정이입이 잘 되던가. 정의를 생각하면 할수록 주먹에 불끈불끈 힘이 ??지 않던가. ‘명분이 되는 폭력’? ‘안정속의 개혁’ 만큼 유혹적이지 않는가?

그런데 요즘은 사이버 시대라 폭도도 직접 몸으로 뛰어다니진 않는다. 익명화된 말로 사이버 공간을 날아 다니거나. 더 음험하게 집단의 의식 속에 바이러스처럼 잠행한다. 지하철에서 개똥을 안 치웠다가 난타당한 ‘개똥녀’ 사건은 익명의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집단 동조에 대한 기막힌 연구대상이다. 인간이 집단으로 있을 때 위험수위가 높은 결정을 하고, 익명화된 인터넷 공간에서는 더 극단적이 된다는 것은 미국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다.

사이버 인민재판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증폭시킨 부분이 있지만 애초에 우리의 집단의식 속에 폭도 바이러스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명분을 제공하는 나약한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암세포 같은 바이러스, 강한 적을 만나면 돌연 태도를 바꿔 열광의 포즈를 취하는 바이러스, 자기가 바이러스인지도 모르는 정신 못 차리는 바이러스. 집단과 명분의 등 뒤에 서식하며 개인에게 독액을 뿜어대는 바이러스, 그리하여 끝내는 주인 없는 구호의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겨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바이러스.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과의 축구 경기를 보다가 이 바이러스가 박주영 신드롬에까지 번져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분명 이 시합의 공로자는 문전 쇄도와 결정적 어시스트를 한 정경호인데 신문에는 온통 박주영 뿐이었다. 중계방송도 박주영을 위한 선전방송 같았다. 뼈도 덜 여문 청소년을 국가 대표로 데려와 ‘세계를 움직이는 큰 힘’으로 광고를 해대는 이 집단적 숭배는 폭도 바이러스가 강한 적을 만났을 때 취하는 전형적인 제스처가 아닌가. 파시즘의 음지와 양지를 두루 드러내는 폭도들의 이 향연이 정의와 축제를 참칭할 때 개인의 목소리는 그 고함에 묻혀 버린다.

신음이라도 좋으니 나는 개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진정한 연대는 온전한 개인에서야 비로소 시작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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