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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20:00 수정 : 2005.06.23 20:00

최성각/ 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아파트 빈터에 잘려 버려진 버드나무를 “옳다구나” 하고 시골의 연구소 지소에 실어나른 때는 지난 겨울이었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껍질은 대기오염 탓이었는지 거무튀튀했는데, 유난히 무거웠다. 도끼질을 해 난로에 집어넣었더니 당연한 일이지만, 잘 타지 않았다. 방금 잘린 나무라 수관에 물이 잔뜩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고 뒤켠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마른 나무를 먼저 태우는 것으로 골짜기의 겨울을 났다. 그리고 봄이 왔고, 이내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지난 주, 우연히 창고 뒤켠의 목재정리를 하다가 보았는데, 놀라워라, 잘린 버드나무 몸통에서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뻗어 있었다. 제법 무성했다. 토막난 버드나무는 외진 데서 살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도마뱀 꼬리가 눈앞에서 쑥쑥 자란다 한들 이보다 놀랐을까. 나무 토막은 “비록 영문없이 뿌리는 잃었지만 나, 결단코 죽지 않았다오”라고 조용히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외침보다 푸르디 푸른 잎을 어떻게 하면 햇살을 더 많이 받아 뻗칠 것인가, 오로지 내 할 일은 그뿐이라는 자세였다.

잘 말려서 겨울에 땔감으로 쓰리라는 생각은 그 순간 사라져버렸고, 악착같이 살겠다는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거기 몰두하게 되었다. 동강난 몸체만 남았지만 싱싱하게 푸른 잎을 밀어올린 버드나무의 생명력은 식물에게도 혼이 있다면, 그것은 결단코 하급의 층위가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잎이 특히 무성한 것들만 네 토막을 골라 마당 복판의 작은 우물에 일단 담궈 두었다.

아파트단지든 길거리에서든 눈에 띄는 대로 주워오는 것은 잘린 버드나무뿐이 아니다. 버린 침대 밑바닥의 널조각도 외면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개중에는 향이 진동하는 질 좋은 나무도 있다. 깨끗한 자개상도 벌써 다섯 개나 모아뒀다. 큰 밥상도 있고, 개다리소반도 있다. 멀쩡한 책상은 왜 그리도 자주 버리는지 알 수 없다. 선반이나 책장, 고가의 장식장도 적잖다. 튼튼한 의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버리는 이유야 소상하게 알 수 없지만 흠집이 났다고, 유행에 뒤떨어졌다고, 산 지 오래 되어 싫증이 났거나 촌스럽다고 생각해 버리는 모양이다. 버리는 일에 도무지 주저가 없어 보인다. 버려진 물건들의 번듯함과 엄청난 양을 생각하면 몹시 우울해진다. 이렇게 멀쩡한 것들을 이토록 손쉽게 버리고, 새것만 죽자살자 사들이는 민족은 반드시 망해야 정신차린다는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적어도 전에는 이렇게 살지 않았던 것 같다.

잘려 버려진 버드나무
땔감으로 쓰려고
주워서 창고 뒤켠 던져놨다
몇달뒤 싹 돋고 줄기 뻗어
“나 안죽었어” 외치는 듯

망치를 들고, 때로는 드릴을 들고 폐기물 수거하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먼저 물건들을 해체한다. 수거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번듯한 물건이라도 가차없이 빠루로 요절내고 해머로 박살을 내서 신속하게 부피를 줄인 뒤, 차에 싣는다. 차에 실리는 순간 그것들은 ‘되살려 쓸 여지가 있는 자원’이 아니라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내가 주로 눈독을 들이고 반가워하는 것들은 버려진 목재들이다. 플라스틱 가구들은 그 고형성 때문에 변형도, 재활용도 힘들다. 태워도 안 되고, 묻어도 곤란한 버려진 플라스틱이 갈 길을 생각하면 참으로 심란해진다. 하지만 목재들은 조금만 손을 보면 그럴 듯한 ‘다른 물건’이 될 수 있다.

물건들이 시골의 앞마당에 자꾸 쌓이자 내 작업도 톱과 망치, 드라이버만으로 부족해 제대로 된 공구들이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했다. 드릴과 전기톱, 그라인더 등이 그것이다. 잘라낸 송판과 대패질을 새로 한 각목들이 설계대로 조립되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누더기 탁자가 탄생한다. 잠깐 뚝딱거리면 의자도 생긴다. 널찍한 개집도 만들었다. 균형을 맞추느라 자꾸 덧대다보니 내 작품들은 좀 무거운 게 흠이다. 그렇지만 내 조악한 목공 작품들을 친구들은 아주 좋아한다. 이 엉터리 무면허 목공에게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독서대도, 앉은뱅이 탁자도 주문받았다. 주문에 고무된 나는 주워온 나무들로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딸애 키에 맞춰 화장대도 만들어주었다. 딸애는 결혼할 때 갖고 가겠다고 기뻐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마당에서 썰매도 만들어주셨고, 병정놀이 때 쓸 멋진 나무칼도 깎아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내 책상 위의 작은 책꽂이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만들어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도시로 몰리고 손끝 하나 까딱 않고 뭐든 쉽게 사들이면서 타고난 손의 기능은 퇴화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것들을 손수 만드는, 바꿀 수 없는 기쁨도 사라져버렸다. 오래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는 일보다는 새것을 사는 게 더 멋진 삶이라고 광고는 쉴새없이 부추겼고,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쉽게 굴복했다. 유한한 자연자원과 그것들이 사람한테 오기까지 걸린 시간에 모두들 무감각해져버렸다. 이런 무신경과 난폭한 낭비는 정말 벌받을 짓이 아닐 수 없다.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고작 태우거나 묻어버리는데, 묻어도 능사가 아니지만 태우면 더욱이나 안 되는 것들을 너무 많이 만든다. 이른바, ‘불필요한 생산’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불필요한 생산이라도 돈이 된다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이렇게 과감한 소비생활은 외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과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어찌 생각하면, 모두들 허무주의자들 같기도 하다.

‘지구라는 우주선에는 승객은 없다. 모두 승무원일 뿐이다’라고 말한 이는 맥루한이었다. 이 행성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은커녕, 시방 우리는 오만한 승객인양 착각의 삶을 살고 있다. 물에 담궈 둔 버드나무 토막을 보고 사람들이 “어쩌면 살겠네!”라고 한마디씩 건넨다. 나무는 아마 자신을 두고 한 소리라 알아듣지 않겠나 싶다. 살든 못 살든, 물이 좀 올랐다 싶으면 대문 옆에 심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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