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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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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참호에서 ‘논리철학 논고’ 초안
“언어란 사실의 논리적 구조를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해주는 매체” 비트겐슈타인은 자식의 교육에 매우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로부터 교육받았고, 그 뒤에는 히틀러가 퇴학당한 린츠의 레알슐레(실업학교)에 입학하여 공학을 공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공학교육은 물리학에 대한 탄탄한 기초교육을 강조했고, 덕분에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지식의 구조와 성격에 대해 착실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볼츠만에게 가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볼츠만의 죽음으로 1908년 영국 맨체스터로 가서 항공공학을 공부하게 된다. 이즈음에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시작된, 그 당시로는 최첨단의 기호논리학과 수학기초론 논의를 접하고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1911년 예나로 프레게를 찾아갔지만 이 당시 이미 충분히 독창적이었던 비트겐슈타인과 노년의 대학자는 서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러셀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했고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해 캠브리지로 러셀을 찾아가 연구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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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구조를 경험만큼 강조 토론보다 타고르 시 낭송 즐겨 <논리철학 논고>는 90쪽이 약간 넘는 얇은 책으로, 장 구별도 없이 2.1.4 식으로 번호가 매겨진 잠언투의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제시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핵심은 흔히 언어에 대한 ‘그림이론’이라 불린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언어는 세계를 그려주는 명제로 구성되어 있고 명제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인데 이때 사고란 사실의 논리적 구조에 대응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란 세계에 대한 사실의 논리적 구조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그려주는(표현해주는) 매체가 된다. 이때 ‘그림’이란 정물화처럼 세계의 사실과 시각적으로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과학이론의 용수철 모형처럼 추상화된 형태로 세계의 ‘논리적’ 특성을 올바르게 잡아낸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상언어에서는 사실의 논리적 구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기에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철학적 ‘해명’ 작업이 필요하다. 이 ‘해명’을 통해 과거 철학자들이 중대한 철학적 문제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언어의 ‘혼동’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해낼 수도 있다. 이 점을 강조하듯 ‘논고’의 마지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이다. 논리실증주의는 흔히 어떤 주장이든 그것이 언제 참이 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는 ‘검증원리’로 대표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또한 경험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기존 철학의 초월적 논증을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하며 그런 논의 자체를 철학에서 제거하려 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자들 사이의 연관은 분명하다. 이들 사이의 연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이 탐구했던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일종의 철학적 분석도구로 삼아 세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가지는 다양한 논리적 구조를 탐구하려 했고, 논리실증주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전체적으로 철학적 작업에서 논리적 분석이 차지하는 역할을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만큼 강조했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 모두 철학의 본연의 임무를 경험과학처럼 세계에 대한 구체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이 가능해지는 조건과 다양한 주장들을 서로 비교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일종의 메타적 ‘해명’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의 철학을 그것이 태동한 20세기 초 빈이라는 구체적 맥락과 분리시켜 일종의 ‘개념적 진공’에서 파악하려 할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프레게만큼이나 쇼펜하우어나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논리철학 논고>는 언어의 논리적 성격에 대한 탐구만큼이나 윤리적 본성에 대한 탐구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해석은 <논리철학 논고>를 자신의 논리적 분석의 후속작업으로 평가한 러셀의 서문에 비트겐슈타인이 격렬히 항의하고 출간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며 결국 그 때문에 러셀과 단교했다는 사실에서도 힘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카르납의 저작은 모든 지식을 확고한 경험적 토대 위에 세우려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칸트의 선험적 종합에 대한 생각을 새로운 물리학 이론에 입각하여 재론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해석이 이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카르납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실용주의적 영향을 받고 쓴 <세계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영문판 서문 내용이 비엔나 서클 당시 썼던 독어판 서문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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