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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6:01 수정 : 2005.06.30 16:01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다음달인 1953년 8월 선거로 뽑힌 이란 모하메드 모사데그 민족주의 정권이 미국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무너졌다. 지난 24일 결선투표에서 보수강경파로 알려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49)가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이란 현대사의 굴곡과 비극은 거기서 시작됐다. 묘하게도 이란 현대사의 주요 고비들은 시기적으로 한반도 현대사의 중대사건들과 적잖게 겹친다. 그것은 두 나라가 서구 제국주의, 특히 2차대전 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정책에서 주요 공작 대상지였다는 공통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1년 민족주의자 모사데그가 총리에 당선된 뒤 영국계 영국-이란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친서방 왕당파들을 밀어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영국과 미국은 모사데그 제거 공작을 시작했다. 공작을 주도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작전명은 ‘아작스 작전’, 핵심 공작요원은 커밋 루스벨트였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모사데그 제거 작전이 성공하자 루스벨트에게 국가안보메달을 수여했다. 중앙정보국이 1천만-2천만달러를 투입한 친미 왕당파 쿠데타 교사로 모사데그를 내쫓고 권좌에 앉힌 것은 비밀경찰 사와크를 앞세운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의 포악한 전제군주체제였다. 미국은 이때의 성공을 토대로,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자국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 소유 바나나 농장을 압수한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등 중앙정보국 대외 비밀공작을 본격화했다.

부패한 팔레비 억압체제는 79년 2월 ‘호메이니 혁명’으로 끝났다. 이란의 반미 봉기는 그해 11월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난입과 미국인 인질사건, 그리고 지미 카터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웃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것도 그해 7월이었으며, 같은 달 니카라과에선 민중봉기로 소모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해 12월에는 소련 몰락을 재촉한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됐으며 미국은 반소 민병대를 지원했다. 역시 같은 해 8월 한국에서는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유혈해산 참극이 벌어진데 이어 권력내부를 뒤흔든 10월18일 부마항쟁, ‘10.26 궁정 반란’, ‘12.12일 신군부의 친위 쿠데타’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미국은 아마디네자드의 강경보수정권 등장이 이란 핵 개발을 둘러싼 파워게임에서 유럽의 개입 여지를 줄이는 등 오히려 자국에 득이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분석들도 있다. 이른바 ‘북핵 문제’로 상징되는 한반도와 미국의 악연(?)은 또 어떻게 전개될지.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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