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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6:50 수정 : 2005.06.30 16:50

새로 쓰는 제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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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제주도 사람들은 1960년 대통령선거 때 이승만에 맞섰다가 졸지에 병사한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미국에 유학하고 흥사단, 신간회에 가담했으며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당하는 등 일제에 저항한 이력이 있고 광복 뒤에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미 군정청 경무부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때는 내무장관이었다.

1947년 3·1절 집회 때 제주도에서 경찰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민관 공동파업이 시작되자 그달 14일 제주도로 간 조병옥은 경찰발포가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였다”며 파업주모자들 검거 명령을 내렸으며 48년 4.3항쟁이 본격화한 직후 진압경찰과 정예부대를 증파하고 악명높은 반공단체 서북청년회 단원 500명도 제주에 급파했다. 그는 “이 번에는 실력으로써 적극적으로 폭도들을 진압 섬멸할 방침”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4.3의) 근본원인은 소련의 야심인 조선의 소련 연방화에 있다”고 강변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역에 휘발유를 뿌리고 거기에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태워 없애야 한다”는 발언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4.3은 도민 3만여명이 ‘빨갱이’ 누명을 쓰고 무차별 도륙당하는 대학살극으로 끝났다.

독재자 이승만의 정적이었다는 이유로 흔히 강력한 ‘민주투사’ 쯤으로 묘사되기도 한 조병옥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정파와 정치적 후계자들의 그 이후 한국정치사내 역할과 비중에 크게 좌우됐다. 호인 ‘유석’과 ‘박사’가 애칭처럼 붙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대체로 호감에 찬 것이었으며, 이는 그의 후예들이나 연합세력이 주류를 구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계급적 현실을 반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점령군의 손발 노릇을 한 철저한 친미파였으며, 친일파를 재등용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및 반공으로 매진한 미 군정청의 무리한 점령정책이 배경에 깔려 있는 제주 4.3비극의 주역 가운데 한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사건 발생 뒤 반세기가 훨씬 지난 2003년 10월31일에야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죄한 4.3비극은, 친일파와 친미파가 결탁해 자신들이 적으로 규정한 토착세력을 말살해간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의 한 전형이다.

지금도 우리사회 주류로 행세

‘지방사, 역사읽기의 새로운 시도’라는 부제가 붙은 <새로 쓰는 제주사>의 지은이 이영권 제주공고 교사는 말한다. “장애물은 여전히 버티고 있다. 학살의 주역들이 참회하지 않는 한, 그들의 방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며 적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딴죽걸기는 계속되고 있다. 4.3은 아직도 끝난 게 아니다.” 4.3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그 모든 역사는 살아있는 인간들이 재구성하는 현대사다.


4·3 학살극의 주역 조병옥
그는 어떻게 민주투사의 얼굴을 갖게됐나
중앙권력에 충실한 주류 역사
소외와 착취속에 살아 꿈틀댄
탐라의 어제와 오늘 ‘바로세우기’

지방사 탐구라는 형식을 통해 역사읽기의 전복, 뒤집기를 시도하는 <새로 쓰는 제주사>가 겨냥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지은이가 다루고 있는 대상은 제주의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광범위한 시간대에 걸쳐 있으며 4.3은 12개의 장 가운데 마지막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그가 “교과서의 역사와는 많이 다른” 지방의 역사에 천착한 이유를 들어보자.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건 단지 국가권력을 장악한 중앙 세력들만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속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이 없습니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역사, 중앙 지배계급의 입장이 철저히 녹아 있는 그런 역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죽는 겁니다. 국가라는 허우대는 있는데 속살은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고려군이든 몽고군이든 ‘외세’

그리하여 그는 독립국 탐라가 대륙 중앙정권에 복속돼 가는 과정을 살피고, 애국주의 고취의 대표적 재료로 이용돼온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나 목호(말 키우는 오랑캐)의 난 평정을 당시 제주도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짚는다. 도민들에겐 삼별초든 고려 정벌군이든 몽고군이든 모두 외세였으며, 원에 저항한 삼별초나 목호 정벌에 나선 고려 진압군을 도민들이 당연히 ‘우리편’으로 여기는 ‘애국적’ 자세를 견지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시절 남긴 글에서 말했다. “이곳의 풍토와 인물은 아직 혼돈상태가 깨쳐지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일본 북해도의 야만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추사는 양호했다. ‘망경루’니 ‘연북정’ 따위를 짓고 자나깨나 서울만 바라보며 임금이 다시 불러올려주기만을 목빼고 기다리던 파견관리 등 중앙 양반들한테 제주는 철저히 소외되고 착취당했다. 주류와 중앙, 그들에 빌붙은 토호들의 가렴주구는 숱한 반란을 불렀다.

지은이는 그런 주류의 시각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과도한 반주류적 애향심도 경계한다. 한때 교과서에 등장했던, 구석기 도래 시기를 크게 끌어올렸다던 제주도 빌레못 동굴 유적 과장선전 등의 예를 들며, 그것마저 국가정통성이나 위광, 지배의 효율성에 연연하는 중앙·주류의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요컨대 지은이는 본토와 제주, 중앙과 지방의 뒤틀린 주종관계를, 중앙 관점에서 지방을 바라봐온 지금까지 시각의 역전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외세와 민족, 양반과 평민, 주류와 비주류, 토호세력과 지역민, 남과 여의 계급적 모순까지 폭로하며 지역민이 중심에 서는 역사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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