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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30 16:50 수정 : 2005.06.30 16:50

강출판사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정진홍 선생은 흰 고무신을 신고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집 인근에 작업실 용도로 마련하셨다는 자그마한 아파트는 단정했다. 책과 책상, 손님맞이용 탁자와 의자가 다였다. 대학시절 선생의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늦가을 오후의 어둑함 속에 불도 켜지 않고 앉아 계셨던 모습이 아마도 이런 정갈함이었지 싶었다. 강출판사로 복귀해서 대책 없는 암중 상태를 하루하루 꺼가고 있는 게 보기 그랬던지 비평하는 후배가 문예지에서 읽은 정진홍 선생의 글 이야기를 꺼냈던 게 그 얼마 전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아Q정전> <햄릿> 등등의 고전 문학작품에 대한 에세이라고 했다. 그러려고 그랬겠지만 마침 도서관이 코앞에 있었다. 모처럼의 일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웬걸, 여덟 편의 글을 문예지에서 찾아 복사하는 데는 한나절도 안 걸렸다. 이젠 글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백지상태의 멍함이 그리도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선생의 글은 고전작품에 대한 찬양과 독서의 권면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나는 이런 작품들을 힘들여 읽고 그 감동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눈떴다, 당신들도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면 이런 작품들은 반드시 읽어야 된다, 라는 흔한 시나리오의 계몽적인 목소리가 거기에는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고전이라는 권위의 성채에 대한 회의와 부인의 몸짓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혼돈 속에서 처음 입을 가르고 나오는 물음들의 산이었다. 카라마조프 이야기만 나오면 왜 다들 알료사고, ‘대심문관편’인가. 내 젊은 날의 상처입고 궁핍한 자존심이 가닿은 대목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 읽었을 때 <마담 보바리>의 그 통속성이라니. 내게 <모비 딕>을 권했던 선배는 정말 작품을 읽기는 읽었던 것일까. 미친 사람을 마음껏 착취하고 조롱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돈 끼호테>는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역설이었다. 선생은 거듭 이들 작품을 읽었고, 그 우연하고 해명하기 어려운 반복의 사건 속에서 각 작품의 고전다움을 자신만의 언어로 새롭게 발견하고 그려내고 있었다. 좌절한 독후감의 흔적들이 한 종교학자의 고백의 언어에 실려 고전의 열린 지평을 향해 거슬러오르는 광경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필독서’라는 권위의 언명에서 비껴나 고전과 젊은 정신들의 다양한 만남을 자극할 가능성이 그렇게, 거기 함께 있었다.

반년 넘게 일을 놓고 있었던 터라 더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가 보다. 여덟 편의 글마다 ‘나를 움직인 대목들’을 넣자고 제안해놓고 보니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진홍 선생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다시 읽으면서 인용문을 뽑고 거기에 일일이 코멘트를 붙였다. 두 달 남짓 걸렸고 원고량이 350매 가량 되었다. 물론 별도의 원고료를 드리지는 않았다. 작품마다 관련 사진 자료를 찾고 그걸 편집해 넣느라 없는 손발이 바빴다. 그렇게 찾은 사진 자료가 아까워서 본문은 2도 인쇄를 했다. 제목을 정하느라 선생을 괴롭힌 수차례의 전화는 결국 “알아서 하시라”는 체념 섞인 대답 끝에 지금의 다소 계몽적이고 권위적인 제목이 되고 말았다. 46판 양장본으로 만들어 책에 고전적 품격을 불어넣어보려던 생각은 본문 필름에 표지 디자인까지 다 나온 상태에서 제본비라는 암초를 떠올리는 순간 좌초했다. 그 덕분에 본문용지 95그램, 380쪽의 두툼한 책은 페이퍼백이라는 몸에 꼭 죄는 옷을 얻어 입고 말았다. 마음만 바쁜 시절이었다. 고전을 ‘다르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나고 질문하는 이 책의 고유한 자리를 편집이나 출간 이후의 과정에서 잘 드러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좀체 끝나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정홍수/강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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